이희우 / 직지지도사

곱게 물든 낙엽들이 석양의 노을빛을 반기듯이, 중국의 단풍도 그렇게 나를 반겨줄까? 직지의 저자 백운이 큰 깨달음을 얻고자 스승을 찾아 떠났던 중국. 설레는 마음으로 절강성 호주시에서 개최된 <백운-석옥의 선(禪)사상과 직지>에 관한 한중 학술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논문을 발표할 학자와 직지 관계자 그리고 공무원, 시의원, 기자 등 일행 23명은 11월 중순 청주공항에서 상해로 출발했다. 그곳에 도착해 처음 방문한 곳은 옥불사다. 절강성 보타산 승려 혜근이 미얀마에 다녀오다 상해에 들러 가져오던 다섯 개의 옥불 중 백옥으로 조각된 좌상과 와상을 모셔 놓았다 하여 옥불사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송나라의 궁전 양식을 모방하여 지은 이 절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장엄하고 처음으로 보는 옥불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나의 발길을 한참동안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튿날 온종일 진행됐던 한·중 학술회의에서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와 백운과 석옥의 선사상, 차 문화에 대한 양국 학자들의 다양한 시각의 논문 발표가 있었다. 이번 학술회의에서 중국학자들은 우리의 직지를 인정하면서도 중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우리학자들은 중국 측에 우리 직지의 독특함과 우월성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셋째 날, 드디어 시작된 하무산(霞霧山) 기행이다. 백운이 스승 석옥을 만나 '불조직지심체요절' 한권을 받아온 곳, 직지 공부를 시작하면서 무척이나 가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새벽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호주시 서남쪽 25km 지점에 위치한 해발 1,200m의 하무산은 봉분처럼 둥근 봉우리마다 단풍이 들어 정겨움을 더 한다. 산을 오르는 길옆은 세월의 더께를 느낄 수 있는 굵은 대나무숲 일색이다. 포장길이 끝날 즈음 고즈넉한 오솔길이 나왔다. 여기서부터 약 1km를 걸으면 천호암(天湖庵)이라고 한다. 이 길이 백운이 걸어서 스승 석옥을 만나러 왔던 길일까? 650여 년 전, 54세의 늦은 나이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승을 찾아온 길, 도를 터득한 후 자신의 선사상을 행동으로 실천했던 백운이 온 곳이었기에 풀잎하나 나무 한 그루, 길 위에 뿌려진 낙엽까지도 예사롭지가 않고 걸음걸음이 역사 같다. 드디어 천호암이다. 이곳은 예전에 어떤 이유에선지 없어지게 되고 최근에 그 터에 운림선사(云林禪寺)로 다시 세워졌단다. 직지의 숨결을 하무산과 천호암 터에서만 느끼고 되돌아 나오는 발걸음은 그저 아쉽기만 했다. 내려오는 길에 석옥의 불교 종파인 임제종의 37대 손을 기린 비석을 보면서 이곳이 천호암이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넷째 날, 항주로 향했다. 동진시대(317-419) 인도의 승려 혜리가 세웠다는 천년고찰 영은사. 석옥이 기거했다는 이 절은 선종의 10대 사찰 중 하나라고 한다. 들어가는 길 옆 아담한 산언덕엔 눈에 보이는 바위마다 각양각색의 부처상을 수없이 깎아 놓아 오가는 이의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천왕전에 걸려있는 편액은 청대의 강희제가 실수로 영은사를 운림선사(雲林禪寺)로 바꿔 썼다는 일화도 듣게 되었다. 영은사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직지당을 보면서 혹시 청주의 직지와 연관이 있을까 기대를 했건만, 사람을 지혜롭게 만들기 위해 포교하는 곳에 불과하다는 학승의 설명에 우리 일행은 실망감을 감추느라 퍽이나 애쓴 듯하다. 항주 차박물관과 주변의 차밭에서 사진 한 컷 찍고, 우리의 인사동과 비슷한 청나라 거리를 구경하고, 항주 서쪽에 있는 밤안개에 휩싸인 서호를 뒤로 하고 상해에 도착하니 자정이었다. 환상적이라는 상해의 야경을 접어 두고, 호텔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별빛을 보면서 내일 새벽 공항으로 떠나기 위해 가방을 챙겼다.

청주시와 서원대학교 직지문화산업연구소의 배려로 이루어진 이번 중국 기행에서 백운과 석옥의 발자취를 따르다 보니, 직지는 끊임없는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의 결정체로 태어났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중국의 단풍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있었지만, 내 마음은 시나브로 배움에 대한 열정의 단풍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이번 여행의 경험을 살려 우리의 자랑인 직지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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