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 법무법인 '청풍로펌' 변호사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때가 되면 죽음을 맞는 것이 신이 정해 놓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나라는 90년대 이후 신생아 출생율은 줄어든 반면 경제적 풍요와 의학 발전에 힘입어 고령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이에 따라 살아있는 동안의 행복한 삶(well-being) 못지않게 아름답고 품위있게 죽음을 맞는 것(well-dying) 또한 새로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대법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한다며 존엄사(尊嚴死)를 인정하는 최초의 판결을 했다. 70대 중반의 김씨는 지난해 2월 기관지내시경 검사를 받던중 심장이 멈춰 심폐소생술 등을 받았으나 심한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식물인간상태에 빠지게 됐다. 이에 김씨 가족들은 병원을 상대로 '노모의 무의미한 연명치료장치를 제거하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제1,2심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병원측이 제기한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환자가 의식 회복가능성이 없고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신체기능 상실을 회복할 수 없으며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한 경우(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는 죽음을 맞이하려는 환자의 의사결정을 존중해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 사회상규와 헌법정신에 부합한다" 며 원심을 확정했다. 나아가 대법원은 존엄사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첫째, 회복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진입했어야 하며 그 판단은 환자측이 직접 법원에 소를 제기한 경우가 아니라면 전문의사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 등의 판단을 거칠 것, 둘째, 환자가 회복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이르렀을 경우에 대비해 미리 의료진에게 자신의 연명치료 거부 내지 중단에 관한 의사를 밝혔어야 하되(사전의료지시), 이것이 없을 경우 환자의 평소 가치관, 신념에 비춰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인정돼 환자에게 자기결정권 행사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연명치료의 중단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경우에는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다는 등의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외국 사례를 보면 1994년 미국 오리건주가 '존엄사법'을 제정해 존엄사를 인정한 이래 40여개 주에서 존엄사를 인정하고 있고, 2002년에는 네덜란드가 처음으로 치사량의 독극물이나 모르핀 등을 주사하는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화시킨 바 있으며, 엄격한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도 소극적 안락사를 인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극적 안락사인 이른바 존엄사에 대한 첫 형사판결인 1998년 5월 '보라매병원 사건'에서 서울 남부지방법원이 병원 의사들에게 살인방조죄를 인정한 이래 의료계와 학계, 종교계를 중심으로 찬반논란이 있어왔다. 그리고 의료 현장에서는 연명치료를 중단해왔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존엄사에 대한 의료현장의 현실을 반영하면서 존엄사 허용의 엄격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찬반논란에 대해 일단락을 지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자못 크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존엄사 허용의 큰 기준을 제시했을 뿐 다양하고 복잡한 사례가 발생하는 의료현장에 적용하기에는 무리며, 생명경시 풍조, 특히 존엄사 남용 문제를 방지할 제도적 장치 마련 등이 시급하다는 점에서 존엄사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

회복불가능한 사망단계에의 진입여부를 판단하는 기준과 절차, 존엄사의 대상 환자를 말기암환자와 뇌사자로 한정할 것인지 아니면 식물인간 일반으로 확대할 것인지, 환자의 의사를 확인하는 방법과 절차, 연명치료 중단의 범위를 인공호흡기나 심폐소생술을 넘어 영양공급의 중지까지 확대할 것인지, 대리인의 선정문제, 자살조력 및 환자의 의사에 반한 연명치료 중단시 형사처벌 문제 등 세부적인 절차와 기준 등에 대해 각계각층의 의견수렴과 공론화 과정을 거쳐 존엄사에 관한 제대로 된 법률의 제정이 필수적이라 하겠다. 류성룡 / 법무법인 '청풍로펌' 변호사 r2846425@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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