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병우 / 충북도교육위원
누구도 예상치 못하던 노무현 前 대통령의 자진(自盡)이 있은 지 닷새째를 지나고 있다.

온 국민을 소스라치게 만들던 그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채, 언론들은 전국의 분향소들에 줄을 잇는 애도 행렬을 전하고 있다.

황망한 일 앞에 다들 하나같이 옷깃을 여미는데, 이 조의(弔儀)가 위선이 아니라면 너나없이 진심어린 회개부터 나설 일이다.

그를 '희망'으로 부르면서도 지켜주지 못한 이들이거나, 마치 괴물인양 물고 뜯던 일그러진 권력과 고약한 언론들까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을 자진(自盡)한 '죄'를 미화 할 순 없겠지만, 세상의 전부인 목숨을 던져 명예 하나를 지키려 한 이에게 경망한 언사(言辭)를 나불거리는 것은 몰염치를 넘어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만큼이나 혼자 겪어야 했을 벼랑 끝의 절망! 그 앞에서 목숨을 던지는 일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도피가 아닌 마지막 항거다.

누군들 목숨을 중히 여기지 않는 이 있으며, 삶에의 애착 역시 본능 아닌 자 있으랴.

대의를 위해 털끝 하나 던져 본 적 없는 자일수록 생명을 던진 것에 대해 가벼이 보고 쉽게 말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는 벌레 수준의 생사관(生死觀)을 지닌 이들일수록, 의로운 죽음조차 함부로 입에 올리고 비아냥댄다.

이번 일을 의로운 죽음으로 추어올릴 생각은 물론 없다. 자신의 표현대로 "면목 없는 일" 의 뒤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거'라는 표현조차 시비 삼는 것(조갑제)은, 그야말로 망자(忘者)의 무덤에 침을 뱉는 짓이다.

그에 비하면 "고통스럽고 감내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해도 전직 대통령으로서 꿋꿋하게 대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는 전두환 前 대통령의 코멘트는, 발언자 자신의 낯 두꺼운 꿋꿋함(?)이 떠올려져 실소가 지어지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야비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맨발로 가시밭길 같은 정치 역정을 걸어 대통령까지 올랐던 투사 노무현.

그 어떤 난관 앞에서도 꾀를 내거나 돌아서 가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승부사 기질로, 영원한 '비주류'의 희망이 되었던 그였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살아있는 권력의 십자포화를 맞으면서도 마침내 이겨, 이 땅이 '사람 사는 세상' 임을 보여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진정성을 대의로 둔 삶일수록 도덕성 문제가 아킬레스건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마음만 먹으면 사람의 머릿속까지 뒤져볼 수 있다는 정보화 시대의 권력에게, 상대의 도덕성이란 참 얼마나 후비고 할퀴기 쉬운 것인가.

"도덕성이 밥 먹여 주느냐" 는 후안무치한 자들에겐 수천억 원의 비리를 적발해내도 치명타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물욕(物欲)에 거리를 두었던 이들일수록 몇푼 금액보다 오명(汚名)과 굴욕감이 치명상이 된다.

거슬리는 '미운털' 과 '눈엣가시' 들에게 바늘 끝 입지(立地)도 주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사회의 옹졸함은, 분향소 주변을 둘러막은 전경차 성벽에 벌겋게 드러난다.

"전경차가 둘러싸 아늑하다는 분도 있더라" 는 경찰 간부의 발언은 이 시대 도덕적 착란상의 단면 그대로다.

이번 5월 27일은 전교조 결성 2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20년전 군사정권에 도덕성 하나를 무기 삼아 맞섰던 전교조도 요즘 부쩍 도덕성 문제로 입길에 오르내리는 일이 잦아졌다.

민주화 과정에 숱한 희생을 불렀던 우리 사회가, 도덕성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데도 또 얼마나 많은 번제물을 요구하는 것일까.

김병우 / 충북도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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