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민청 오가는 시민들, 대부분 뭔지도 모르고 잠금장치도 못풀어

 

8일 오후 서울시 신청사 시민청. 올해 1월 개장한 시민청은 각종 편의시설에 공연장과 전시실을 갖춰 시민들이 즐겨 찾는 서울의 새로운 명물로 자리 잡고 있다.

10대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오가는 이곳에도 멈춘 심장에 전기충격을 줘 다시 뛰게하는 심장제세동기(AED)는 설치돼 있었다.

AED는 시민청 안내 데스크 바로 옆 1m 남짓한 높이의 흰색 철제 박스에 담겨있었다. 노란색 본체는 얼핏 보면 옛날 공중전화를 떠올리게 했다.

시민들은 이 기기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뉴시스는 전날 오후부터 이날까지 오후까지 시민청을 찾은 남녀노소 20여명에게 AED 인지여부와 사용법 등을 물었다.

시민들은 의료 드라마에서 한번 쯤 봤을 법한 AED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눈앞에 놓인 물건이 무엇인지를 알지는 못했다.

일단 박스 표면에 적힌 'AED'와 '자동제세동기'라는 전문용어를 낯설어 했다. 파손 경고문에 작은 글씨로 쓴 '심장충격기'라는 용어를 보고서야 용도를 알아챘다.

기자는 시민들에게 AED의 존재를 인지시킨 뒤 시연을 해보라고 권했다. "일반인은 누구든지 사용가능하다"는 설명과 함께였다.

하지만 박스에서 AED를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잠금장치를 푸는 과정이 복잡한데다 설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은 한결같이 잠금장치를 푸는데 실패했다.

기자의 설명에 간신히 잠금장치를 풀고 박스 커버를 열자 휴대용 공구함 크기 정도의 AED가 나왔다.

사용법을 안내하는 그림을 가리키며 시연을 부탁하자 "의사도 아닌데"라며 다들 손사래를 쳤다.

사전에 사용법을 습득하고 있지 않으면 응급상황에서 안내 매뉴얼에 따라 이 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어려워 보였다.

제작사측 설명대로라면 시중 판매가가 300여만 원에 달하는 고가의 기기지만 도난에도 무방비 상태였다.

박스 커버를 열면 실제로 '삐~'하는 경보음이 나긴 했지만 휴대가 간편한 AED를 빼내 문만 닫으면 경보음이 곧바로 그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했다.

도둑이 물건을 훔치려고 문을 열었을 때에는 경보음이 나지만 물건을 훔친 뒤 문을 닫으면 경보음이 곧바로 그치는 셈이었다.

도난상황을 가정해 AED를 3~4회 연속적으로 빼고 넣는 것을 반복하자 그제야 근처 안내 데스크 직원이 상황을 살피러 왔다. 하지만 도난을 우려해 온 것이 아니라 소음 탓인 듯했다.



그렇다면 시민청 내에서 실제로 심장마비 환자가 발생하면 어떻게 될까. 현재로서는 AED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고귀한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싶다.

시민청 안내 데스크의 직원은 기기의 존재 여부는 알고 있었지만 활용법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담당자를 불러달라는 요청에 시민청을 관리하는 서울문화재단 관계자가 5분여 뒤에 올라왔다.

이 관계자는 잠금장치를 쉽게 풀었지만 사용법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했다.

서울문화재단 관계자에 따르면 A의료기기 회사는 한 달 전께 사전예고 없이 AED를 이 장소에 설치했다. 하지만 활용 교육 등 후속조치는 전무한 상태다.

시민청의 AED는 말 그대로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 셈이었다.

시민들은 이처럼 고가의 의료기기가 그대로 방치돼 있다는 것에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평소 시민청을 자주 찾는다는 김정환(80·한국 효도회 이사) 할아버지. 그는 기자의 부탁에 10여분 동안 AED를 만지작거렸지만 뚜껑을 여는데 실패했다.

김 할아버지는 "사용하기도 어렵지만 작동이 되는지도 미심쩍다"며 "꼭 필요한 기기인데 일반인이 쉽게 사용할 수 있도록 정부가 빨리 조치를 취해야한다"고 말했다.

김모(27·여)는 "이게 심장제세동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정부의 전형적인 전시행정이라고 봐야한다"고 말했다.

친구와 함께 돌고래 '제돌이' 방류와 관련한 사진전을 보러왔다는 박모(52·여)씨도 "사람 살리겠다고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이래가지고서는 사람을 살릴 수 있겠느냐"며 "사람을 살리려는 진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와 지자체는 지난해 8월부터는 관련법에 따라 공공보건의료기관, 구급차, 공항 등 다중이용시설과 500세대 이상의 공동주택에 AED를 의무적으로 설치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6500여대의 AED가 설치돼 있으며 서울시에만 2700여대가 산재해 있다. 죽은 심장을 살리겠다고 설치해놓은 AED. 하지만 그 기능은 죽은 것과 다름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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