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연 칼럼]대전·세종본부장

'갑을 관계'란 말이 우리 사회의 핫이슈로 등장했다. 그동안 강자인 '갑'에게 숨죽이며 살아온 약자 '을'이 갑의 횡포를 고발하면서 '을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박혀 있는 강자의 비뚤어진 행태가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왜곡된 갑을 관계의 청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갑(甲)과 을(乙)은 원래 한자어로, 첫째와 둘째를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갑을 관계는 계약을 맺을 때 주로 쓴다. 갑은 우위에 있는 쪽이고 을은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는 쪽을 가리킨다. 갑을 관계는 다양한 분야에 존재하며 종종 상하관계로 인식되곤 한다.

갑을 관계에 대한 담론은 남양유업의 영업사원이 대리점주에게 폭언과 함께 제품강매 사실이 공개되면서 촉발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남양유업 사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강자인 대기업 본사와 약자인 대리점 간의 불평등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공정위는 우유업계의 고질적인 갑을 관계를 청산하고, 본사와 대리점 간 불공정거래가 만연한 다른 분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남양유업 사태에서 힘 있는 '갑'이 힘없는 '을'을 꼼짝못하게 만드는 '비뚤어진 갑을 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와중에 전통주 제조사인 배상면주가의 한 대리점주가 본사의 막무가내식 밀어내기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 파문이 일고 있다. 전국 중소상인·자영업자 생존권 사수 비상대책협의회는 "대리점주와 같이 힘 약한 중소상인들이 '갑의 횡포'로 인한 어려움을 자신들의 경영 실패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진상조사와 함께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갑을 관계는 대기업과 협력업체와의 관계에서부터 '슈퍼 갑'과 '을'의 관계인 약사와 도매상 간 관계 등 뿌리깊은 갑을 관계의 모습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최근 라면을 제대로 끓이지 못한다며 비행기 승무원을 폭행한 대기업 상무, 중소제과업체 회장이 차를 빼 달라는 호텔 지배인을 폭행한 사건 등 이른바 '라면 상무', '빵회장'이란 신조어는 '을'의 슬픈 현실을 말해준다.

그동안 관행으로 굳어져왔던 갑을 관계가 갑자기 주목을 받게된 것은 대기업의 불공정 행위를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말못하고 살던 '을'들의 반격은 최근의 경제민주화 열망과 무관치 않다. 갑을 문화는 불공정거래에서 비롯되는 만큼 그 답을 경제민주화에서 찾아야 한다.

물론 갑을 관계에 있어서 갑은 서비스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고, 을은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를 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수평적인 사회적인 거래관계를 '갑'의 위치에 서는 수직적인 신분관계로 잘못 해석하고, 행동 하거나 비열하게 악용하는데 있다. 요즘 이슈의 한 가운데에 있는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이 그렇다. 갑으로서 우월적인 지위에 있는 윤 전 대변인이 막강한 지위를 이용해 약자인 인턴여성에게 보여준 폭력성은 갑을 관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언론에서조차 '윤창중 추문'은 자질이 부족한 인물이 권력을 등에 엎다보니 '슈퍼 갑'의 심리가 발동해 빚어졌다고 보고 있다.

사실 직장에서도 고용주 갑과 고용인 을의 계약관계가 있다. 갑을 관계에서도 비정규직은 '을 중의 을'로 통한다. 드라마 '직장의 신'은 비정규직의 참담한 현실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다. 얼마전 폐지된 개그콘서트 '갑을 컴퍼니'라는 인기 코너가 있었다. 이 코너는 직장내에서 슬프면서도 우스운 상황을 연출한다. 선배는 신입사원에게 늘 '갑'의 중요성을 깨우쳐준다. 신입사원은 항상 만취한 상태로 등장하는 언제나 '갑'인 사장앞에서 쩔쩔매곤 한다. 회사생활을 잘 하려면 갑을 관계만 잘 알면 된다는 것이 선배의 충고다.

비뚤어진 갑을 문화의 개선은 부조리의 행태가 가장 심한 대기업과 중소기업 또는 협력업체와의 '공생'에서 찾아야 한다. 남양유업 사태이후 불매운동과 주가 하락이 이어지는 것처럼 대기업이 제 배만 불리겠다면 그 기업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이제 우리 사회의 갑을 관계의 성장통이 시작됐다.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인 일그러진 갑을 문화를 바로잡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갑을 관계에서 '을'이 있어야 '갑'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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