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영화채널에서 방영되는 영화가 있다. 2003년에 제작된 로맨틱코미디 '러브 액추얼리'다. 영국인들의 문화와 정서가 함축돼 있는 따뜻한 영화다. 영국인 특유의 자존심도 은근히 보여준다. 영화에서 영국의 총각 수상은 관저인 다우닝가10번지를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 거만을 떨자 통쾌하게 한 방 먹인다.

"영국은 작은 나라지만 강합니다. 우리에겐 셰익스피어, 처칠, 비틀스, 숀 코넬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해리 포터도요. 축구선수 베컴의 왼발도 있습니다. 물론 오른발도요(웃음). 힘에는 힘입니다. 미국은 대비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영국 수상의 큰 소리에는 한때 식민지로 지배했지만 지금은 초강대국이 된 미국에 대한 열등감이 묻어있다.

18세기 영국은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한 식민통치로 '해가지지 않는 제국'이었다. 역사학자 닐 퍼거슨이 펴낸 '제국(Empire)'은 17세기만 해도 해적국가에 불과했던 대영제국의 발전사에 확대경을 들이댔다. 빅토리아 여왕은 100개의 반도, 500개의 곶, 1천개의 호수, 2천개의 강, 1만개의 섬을 지배했다. 유럽에서도 변방이었던 영국이 전 세계 영토와 인구의 25%를 지배하는 제국으로 성장한 것은 인류사를 뒤바꾼 엄청난 드라마였다.

영어를 비롯해 의회제도, 교육, 의복, 스포츠 등 영국의 모든 것이 전 세계 기준이 됐다. 하지만 한때 세계를 호령하고 세계를 지켰다는 자부심은 흘러간 옛 이야기다. 독일과 프랑스가 주도권을 쥔 유럽에서 영국은 변방이다. 영국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이탈)를 통해 유럽을 벗어나고자 했던 심리의 기저에는 과거와 다른 현실에 대한 자괴감이 드러난다.

영국은 과연 다시 부상할 수 있을까. 영국의 주요 언론에서 포스트 브렉시트 모델로 거론되는 나라가 스위스와 캐나다라고 한다. 하지만 롤모델로 뜻밖의 나라도 등장했다. 한국이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칼럼니스트인 크리스천 스퍼리어가 최근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에도 번영할 수 있다는 증거를 원하느냐? 그럼 한국을 봐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스퍼러리가 롤모델로 한국을 주목한 것은 인구와 면적이 비슷한데다 영국처럼 고도(高度)로 도시화돼 있고, 창의적인 '소프트 파워'를 주축으로 삼아 번영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무엇보다 1997년 외환위기와 9·11 테러로 대미(對美) 수출이 급감하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직면했지만 한국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으로 경제를 운영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수출주도형, 첨단기술 기반 경제'가 브렉시트 찬성 측과 영국산업연맹이 항상 주장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에서는 경제학자마다 '한국 경제위기'를 입에 달고 산다. 수출은 정체되고 사상초유의 가계부채에 고령화와 심각한 청년실업이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경고등이 수시로 깜빡인다. 하지만 나라밖에서 한국은 IT강국이자 번영하는 나라다. 6·25직후 영국의 더타임스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고 비웃었다. 쓰레기통으로 비유됐던 한국이 영국의 롤모델이 됐다. 그래서 나라도, 세상도 돌고 도는 것이다. / 박상준 논설실장·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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