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고스톱판에서 10월을 의미하는 '풍 10자리'는 반가운 패가 아니다. 판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해 비, 풍, 초, 똥, 삼, 팔이라는 익숙한 순서처럼 패가 꿀릴 때 미련없이 버리는 '카드'로 간주된다. 노란사슴과 붉은색 단풍 그림은 '낮에는 홍엽(紅葉), 밤에는 홍등(紅燈)'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기도 한다.

화투는 왜색문화라는 선입견이 있기는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한·중·일의 세시풍속과 생활문화가 복합적으로 배어 있다. 이야기 삼은 '풍 10자리'의 경우는 일본의 생활문화가 전적으로 반영된 패이다. 한국의 고스톱 판에서 우습게 취급되는 것과 달리 '풍 10자리'는 일본의 호족문화와 자연의 세계에서 호젓한 가을을 제대로 즐기는 암사슴의 도도함이 숨겨져 있다.

인도에서 소가 웬만한 사람 이상의 대접을 받았던 것처럼 일본 나라현에서는 사슴이 그런 대접을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710년 무렵 나라현을 지배했던 후지와라 가문은 자신을 신격화 했다. 이들은 신사(神社) 카스가따이사를 세웠다. 그리고 도쿄 인근에서 신을 모셔왔는 데, 신을 태워 왔다는 흰 사슴을 신성한 존재로 만든다.

후지와라 가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슴을 죽인자는 참수나 생매장까지 했다하니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짐작할 수 있다. 밤 사이 죽은 사슴이 집 앞에 놓이기라도 하면 '참수의 형벌'을 면하려 숨가쁘게 옆 집으로 옮겨 놓곤 했다는 살벌한 이야기가 나라현에는 전해진다. 사슴은 지금도 한정된 공간지만, 과거와 같은 대접을 받는다.

일본 오사카·교토 등 관서지방을 찾는 한국 관광객들의 단골 코스 중 하나가 나라현 동대사(東大寺)이다. 삼국시대에서 시작된 불교 교류가 지속돼 동대사는 고려 현종(1011년) 때 판각한 천년 유물 초조대장경 판본을 소장하고 있는 전통사찰이기도 하다. 사찰을 들어서면 세계 최대 목조건물이라는 대웅전도 눈길을 끌지만, 입구 방목된 사슴은 관광객들의 시선을 압도한다. 신성한 불교사찰이 사슴공원이 된 것이나, 후각을 자극하는 배설물은 방문객들을 의아하게 한다. 사슴을 최고로 대접하던 8세기 풍습과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풍 10자리'에 등장하는 사슴은 바로 이런 대접을 받는 사슴이었다. 고개를 슬쩍 돌려 아래를 응시하는 사슴의 눈길은 그림의 '포인트'이다.

풍년이어도 쌀농가는 행복하지 못하다. /사진 중부매일 DB

작품(?)에는 생략됐지만, 암사슴은 자신의 꽁무니를 무던히 따르는 한무리의 숫사슴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사슴에게 10월은 2세를 준비하는 시점이다. 그림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간파할 수 있을 게다. 그래서 '풍 10자리'는 무리를 거느린 암사슴의 도도함과 풍요로움을 표현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본래 10월은 암사슴 시선만큼 풍요로움이 넘쳐야 한다. 그러나 쌀을 비롯한 농작물 값은 오히려 곤두박질 쳐 '풍요의 계절'이 무색하다.

/ 한인섭 부국장겸 정치행정부장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