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상당산성 / 중부매일 DB

아침 햇살 눈부시던 그 자리에 뉘엿뉘엿 석양이 물들었다. 심술 가득한 찬바람이 내 어깨를 스치더니 뱀허리처럼 휘어진 도시의 골목길 속으로 사라졌다. 어쭙잖은 마천루 풍경은 삭막하고 번잡하지만 환생과 순환의 기나긴 시간이 담겨 있다. 그리하여 도시는 거칠지만 봄의 들판처럼 풍요롭다. 그 뿌리는 문화원형이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정신적인 고향이다. 가슴속에 접어두었던 유목민의 꿈이 꿈틀거리니 내 몸의 근원이자 문화유전자를 찾아 길을 나선다. 이름하여 청주의 인문 10경이다.

청주인문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아픈 시대 온 몸으로 지키려 했던 청주사람을 찾아 나서는 일은 순례자처럼 거룩하다. 단재 신채호와 의암 손병희. 단재는 조국의 부강(富强)을 위해 역사, 문학, 언론, 독립운동 등에 힘쓴 아나키스트다. 단둥을 거쳐 칭다오회의에 참석하고 북경과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으며 뤼순형무소에 갇혀 옥살이를 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차디찬 감방에서 순국했다. 의암은 민중과 민족과 하늘의 뜻을 섬기는 동학의 교주로, 3·1독립만세운동 민족대표로 청춘을 불꽃같이 살았다. 동학의 횃불이 충북에서 활활 불타올랐음을 명심할 일이다.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청주사람이 분연히 일어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천오백년의 길 상당산성. 모진 풍파를 견뎌온 소나무들이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나그네를 반긴다. 갈라터진 흑갈색 성곽은 역사의 자연스런 발현이다. 포곡식 석축산성 그 속에는 궁예를 시작으로 수많은 신화와 전설이, 선인들의 치열했던 삶의 곡절이, 방랑자들의 시와 노래가 숨어 있다. 4.2㎞의 성곽길을 따라 오붓하게 걷다보면 바람과 햇살과 구름과 산새들의 합창이 무심한 내 마음에 노크를 한다. 가슴 뜨겁게 살라 한다.

청석굴을 시작으로 용소, 천경대, 옥화대, 금봉, 금관숲, 가마소뿔, 신선봉, 박대소로 이어지는 옥화구곡은 자연과 세월이 빚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사계절 낮고 느리게, 깊고 진하게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굽이치는 강과 기암괴석과 숲이 장관이다. 그 속에 신화와 전설이 있으니 호수를 보며 숲 사이로 이야기길 따라 걸으면서 호사를 누리면 어떠한가. 나는 소망한다. 이곳에 자연친화적인 치유의 길, 스토리텔링의 숲을 만들기를. 아름다움으로 물결치는 자연의 빛과 결과 향을 내 마음 마디마디에 흩뿌리면 더욱 좋겠다.

가로수길은 생명문화도시를 상징하는 청주의 관문이다. 어디 가로수길 뿐이던가. 가호리 상수리나무, 은행리 은행나무, 화장사 가침박달나무군락, 오송 음나무 등 마을마다 골목마다 수백 년 수령의 어르신나무가 있다. 점과 점이 만나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만나 공간을 이루며, 공간과 공간이 어우러져 공동체를 만든다. 나무마다 스토리가 있고 지나 온 세월 수많은 아픔과 영광을 간직하고 있다. 그 길을 걸어보자. 어르신 나무 그늘 아래 정처없는 마음을 부려놓자. 나누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태어났고 어떻게 살 것인지 물어보자. 나무는 그저 푸른 미소로 화답할 것이다.

변광섭 팀장

우리는 이곳을 탕마당이라고 불렀다. 드넓은 마당에 우물이 세 개 있었는데 상탕은 세종대왕이 121일간 머물면서 안질 등을 치료했던 곳이고, 중탕은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려 마셨다. 등목을 하거나 세수를 하면 온 몸이 알싸해지며 모두들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 아래에는 노천탕이 있었는데 물기둥이 하루에 한 번씩 하늘 높이 치솟곤 했다. 세종대왕은 이곳에서 한글창제의 과업을 마무리하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실천했다. 일제치하에서는 일본인들이 초정약수까지 약탈해 갔으며, 백중날에는 청주에서 가장 큰 축제가 펼쳐지곤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경전이고 종교이며 운명이다. 그래서 질그릇 같은 삶, 오지그릇의 삶이 그리워지고 민무늬 사랑이 새삼스럽다. 본질에 충실할수록 아름다운 법인가. 삶의 향기 따라 떠나는 추억여행이 더 이상 나만의 본능이 아니고 우리 모두의 가치로 발전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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