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콘텐츠진흥팀장

옜 연초제조창 전경사진 / 중부매일 DB

여행은 생각의 산파라고 했던가. 일상으로부터의 일탈을 통해 느끼는 설렘과 낯선 풍경은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길 위의 인문학이다. 세상을 보는 인식의 확장이자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며 사유의 보궁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낭을 멘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탐방하며 도시의 흔적을 엿보기도 하며 재래시장에 가서 그들의 삶과 애환을 훔친다.

청력과 시력을 잃은 헨렌 켈러는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이란 글에서 첫째 날은 인생의 스승을 찾아갈 것이고, 둘째 날은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박물관을 찾아가 하루 종일 인간이 진화해 온 궤적을 두 눈으로 확인할 것이며, 마지막 날에는 출근길의 사람들 표정을 볼 것이라고 했다. 박물관이야말로 나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이자 우리 이웃의 모습이며 역사의 거센 물줄기를 온 몸으로 호흡할 수 있음을 웅변한 것이다.

몇 해 전 캐나다 벤쿠버 방문길에 브리티시콜롬비아대학교의 인류학 박물관을 꼼꼼히 살펴본 적이 있었다. 원주민들의 삶을 오롯이 담고 있는 곳인데 관람객의 눈높이에 맞춘 전시연출, 시민들을 위한 교육체험 프로그램, 문화유산을 활용한 문화상품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자원봉사와 시민도슨트 제도가 박물관을 더욱 알곡지게 했으며 유물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이름하여 샤울라거(schaulager). 보는 수장고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었던 것인데 전시장, 수장고, 작품 복원실, 아카이브 등이 유기적으로 운영되면서 방문객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미술관·박물관의 도시로 불리는 스위스 바젤에는 독특한 기능과 외형을 지닌 기념비적인 미술관들을 많은데 그중에서도 샤울라거와 비트라 캠퍼스가 주목받고 있다. 샤울라거는 독일어로 '보다'를 뜻하는 '샤우언'(schauen)과 '창고'를 뜻하는 '라거'(lager)의 합성어다. 일반 대중보다는 미술관을 연구하고 미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꼭 가보고 싶은 미술관으로 꼽는다. 스위스 가구회사 비트라가 세운 비트라 캠퍼스는 프랑크 게리, 알바로 시자, 자하 하디드, 안도 다다오 등 세계적인 현대 건축가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곳이다.

옛 청주연초제조창에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이 들어선다. 불 꺼진 담배공장에 문화의 불을 켜고 예술의 꽃을 피우며 아트팩토리라는 신산업의 장을 열게 된 것이다. 1946년에 문을 연 청주연초제조창은 연간 100억 개비의 담배를 생산하고 세계 17개국으로 수출하는 등 근대산업의 요람이자 청주사람들이 진한 땀방울을 흘리며 꿈을 빚었던 곳이다. 공간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지고 사랑도 사라진다. 오랜 세월 인고의 시간을 견뎌 왔기 때문에 담배공장이 문화공장으로 변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부는 이곳에 수많은 미술작품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복원하며 아카이브로 특화할 것이다. 국내 최초로 보는 수장고의 기능과 다양한 전시, 교육, 학술 등의 콘텐츠가 진행될 것이다. 담배공장 일원의 도시재생 사업이 마무리되면 청주의 새로운 랜드마크가 될 것이니 생각만해도 군침이 돈다.

변광섭 팀장

바라건대 현대미술관 청주관은 기존의 관습이나 행정의 잣대로 보지 말자. 거칠고 야성적인 담배공장의 공간적 특성과 샤울라거의 시대적 트랜드가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청주관의 이슈 포인트가 무엇인지, 이를 특화하기 위한 전략이 무엇인지 지금부터 짜내야 한다. 당연히 특화장르가 필요할 것이고, 글로벌 아트상품으로 차별화하며, 교육콘텐트를 통해 세계 미술학도의 전당이어야 한다. 세계의 미술관들과 휴먼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지역의 전문가와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갖추어야 한다. 작금의 문화계 안팎의 곤궁함을 생각하면 목젖이 아프다. 정의도 비전도 없다. 당장의 이익과 이기심과 이벤트에 몰입돼 있다. 1년 농사 중에 비싼 농작물이 있던가. 100년을 바라보며 함께 손잡고 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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