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컨텐츠진흥팀장

위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으로 해당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자거나…. 기내에서 다섯 시간 넘게 머무르며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것뿐이다. 열 시간 넘게 걸리는 유럽 여행길에 오르면 그 고단함과 지루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항상 출발 전에 읽기 편한 책을 한 권씩 챙긴다. 영화도 한 편 보고 피곤하면 쪽잠을 청한다.

태국 방문길에서는 대한민국 대표적 문장가이자 시대를 관통하는 소설가 김훈의 '공터에서'를 읽었고, 역사가 잊고 나라가 감췄던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 이야기를 다룬 영화 '덕혜옹주'를 보았다. 김훈은 역사적 구조물과 시대적 간극 사이의 궁핍하거나 비애로 가득찬 자화상을 공터라고 설명했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군부독재 시절의 애증과 갈등, 폭압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으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독자들에게 되물었다.

영화 '덕혜옹주'는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외롭게 생을 마감했던 덕혜옹주의 묵직한 울림이다. 어린 나이에 고종황제의 죽음을 목격하고 일본으로 끌려가 냉대와 감시로 슬픈 시대를 보낸 그녀는 일본인과의 강제결혼, 정신병원 감금 등을 겪으며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쇠약해진다. 치욕스러운 시간속에서 그녀를 붙들었던 건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삶의 터전을 되찾겠다는 결연한 의지뿐. 그러나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은 해방 후에도 그녀를 찾지 않는다. 독립운동가의 노력으로 고국 땅을 밟았지만 쇠잔한 삶에 어두운 그림자만 드리울 뿐 희망도 미래도 없다.

비행기 안에서 한 권의 소설과 한 편의 영화를 보며 가슴이 먹먹했고 코가 시큰했으며 눈시울이 뜨거웠다. 두 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수없이 훔쳐야 했다. 위기의 시대, 절망의 시대에 나의 꿈은 무한하고 갈 길은 정처 없기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나 자신에게 강철같은 의지와 결연한 행동, 솔로몬의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기도를 했다. 태국 방콕에서 열린 'K-Chopsticks' 특별전이 진한 감동과 문화적 가치를 만들어 준 것에 감사함도 잊지 않았다.

이번 전시는 젓가락 비문화권에서 열린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태국은 한중일 3국과 달리 찰기가 없는 인디카쌀을 주식으로 한다.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아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거나 직접 손으로 음식을 먹기도 한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경우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수저문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다.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도 있겠지만 한류열풍에다 젓가락질이 지능발달과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태국 사람들은 한국의 쇠젓가락에 유난히 관심이 높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의 쇠젓가락은 수시로 도난당할 정도다. 향유층들은 디자인으로 무장한 수저를 컬렉션하는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한국의 지능 젓가락을 매년 수십만 개 수입할 정도인 것을 보면 젓가락으로 세계를 사로잡는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젓가락 특별전에 선보인 공연과 장인들의 시연도 높은 인기를 끌었다. 청주농악을 현대적인 퍼포먼스와 젓가락 장단으로 선보인 놀이마당 '울림'은 현지인들에게 흥겨움과 참여와 감동의 장을 만들었다. 불에 달군 인두로 한지에 그림을 그리는 낙화장 김영조씨, 거침없이 휘갈기는 망치질에 나뭇결이 밀려나가면서 매혹적인 반가사유상을 만드는 목불조각장 하명석씨, 천 년 전 우리 조상들이 사용했던 그 정성과 기법을 담은 산초나무 젓가락 작가 이종국씨의 시연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의연하며 진한 향기기 있다. 40도를 넘나드는 더위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교통체증에 심드렁했다.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컨텐츠진흥팀장

프랑스 요리 다음으로 맛있다는 태국음식은 맛과 향 모두 가볍고 맛이 겉돌았다. 반면에 우리의 문화는 삶에 젖고 스미며 저마다의 가치와 흥겨움을 만들어 왔기에 세계적인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머뭇거리지 말자. 독수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세계인의 가슴에 진한 울림을 만들자. 가장 아름다운 날,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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