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컨텐츠진흥팀장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행사 관련 자료사진 / 중부매일 DB

향로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 안에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푸른 녹이 스며들어, 빛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걸 본다. 예술 이전에 금속이었을 몸과, 불꽃의 한복판을 지나왔을 뜨거운 적금의 순간과, 우주였을, 우주의 일부를 통과했을 수천 년의 나날들이, 반짝이고 있는 게 보인다. 명멸하는 불빛을 매만지고 다듬었을 손, 손의 일부가 굳은살이 되어가던 날들을 떠올린다. 향로를 공예 이전이거나, 공예 그 이후로 나아가게 하고 싶다. 향로를 만들던 최초의 땀내로 돌아가, 사람의 냄새와 구도의 향훈이 만나게 하고 싶다. 지구 구석구석을 위로하며 순례하게 하고 싶다. 전쟁과 기아로 죽어가는 이들의 가엾은 이름 앞에, 지진과 해일로 무너진 이웃의 지붕 아래에, 오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이의 탁자 위에 올려, 서로를 가만히 느끼게 하고 싶다. 바라보고 냄새 맡고 쓰다듬고 마침내, 정신의 일부분으로 간직하게 하고 싶다.

기억하시는지요? 2011년 가을, 불 꺼진 청주담배공장에서 공예비엔날레의 문을 열 때 당신의 시 <향로>는 모든 이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그리고 40일간 열린 행사장에서 매주 토요일 '가을의 노래, 시인의 노래' 퍼포먼스를 함께 했지요. 공예와 시와 춤과 노래가 있는 아주 특별한 행사는 꽃처럼, 나비처럼, 바람처럼, 햇살처럼 가을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빛나는 추억이 되었습니다. 당신께서는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정호승 시인의 글을 낭송했지요.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 공연히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그리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흔들리며 피었나니…"라며 당신의 시를 직접 읊었지요. 저는 그날 무량하게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됐던 거칠고 야성적인 담배공장을 공예비엔날레 행사장으로 꾸미는 일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철거냐 보존이냐 논쟁에서부터, 국제행사를 폐공장에서 하는 것에 대한 저항도 거셌습니다. 켜켜이 쌓인 비둘기똥과 찌든 담배냄새와 곳곳에 폐허가 된 그곳을 온전하게 다듬는 일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피를 토했고 물똥을 쌌으며 괜한 짓 했다며 자책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과는 매우 훌륭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칠고 야성적인 공장이 문화예술과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공간이라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생얼미인이라며 군침도 흘렸습니다. 바다 없는 청주에 문화의 바다를 만들자며, 세계적인 아트팩토리로 가꾸자며 흥분했습니다. 그날 알았습니다. 견딤이 쓰임을 만든다는 것을, 오래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는 것을, 공간은 역사를 낳고 사랑을 낳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도시의 흉물이 세상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담배는 생산되지 않지만 문화를 생산하고 예술의 꽃을 피우는 위대한 성찬은 그 날 이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화가 없는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이 곧 문화이고 한 시대의 경향이며 한 나라의 품격입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만 최고의 복지는 문화복지일 것이며, 최고의 일자리는 문화적인 일자리일 것입니다. 최고의 행정도 문화행정일 것이며, 최고의 통일 또한 문화가 있는 통일이 아닐까요. 외교와 도시개발과 농촌경제와 100세 시대를 디자인 하는 모든 것을 문화에서 묻고 문화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지역과 세대와 계층간의 갈등을 푸는 것 또한 문화입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단재 신채호 선생도 국권회복을 위해 문화의 힘을 키우자고 하지 않았던가요.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컨텐츠진흥팀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슬픈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치유와 공감과 축복의 문화이어야 할 그 자리에 아픔과 갈등으로 멍들어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은 천근만근이겠지요. 문화로 마음껏 희망하는 세상을 위해 힘써 주세요. 우리 고유의 삶과 멋, 그리고 한국의 문화예술이 세상에 젖고 스미며 물들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희망이고 감동이며 존재의 이유가 되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시 '향로'처럼 진한 땀방울이 헛되지 않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고, 세상의 모든 존재의 빛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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