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엔 꽃 피고, 인고의 생명 움튼다

보은 삼년산성

자연은 선하다. 그 자체만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새로움과 에너지로 충만케 한다. 물의 흐름이 그렇고 쉼 없이 피고 지는 숲이 그러하며 풋풋한 대지의 기운이 그렇지 않은가. 그 속에서 살며 사랑하며 하나가 되어 온 우리네의 삶은 또 어떠한가. 수많은 생명들이 서로 보듬어 주고 품어주며 움트는 생명의 환희를 온 몸으로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의 자궁이다. 그리하여 자연은 각다분하고 더러운 내 안의 찌꺼기, 인간이 빚어낸 오탁(五濁)을 맑고 향기롭게 정화시켜 준다. 새로운 생명이 잉태하는 성스러운 영역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연의 품으로 달려가려 한다. 자연이 주는 생명의 근원을 찾고 베개 삼아 눕기도 하며 등목도 한다. 그 속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우리라는 공동의 가치를 찾으며 대자연을 벗삼아 오달지고 마뜩하게 살고자 한다.

집에서 나올때는 법주사에 들러 마음의 등 하나를 달고 문장대를 등정하려 했다. 일 년에 한 번은 그리해도 좋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보은군청을 지나 법주사를 향해 달리던 중 차창 밖으로 드높은 기개를 뽐내는 산성이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이곳을 수없이 지나갔지만 성곽이 눈에 띄지 않았는데 오늘따라 유독 눈에 잡히니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다. 삼년산성과의 밀월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37번 국도변의 오정산 능선에 자리잡은 삼년산성은 둘레 1.7㎞, 넓이 8~10m, 높이 13~20m의 규모로 4개의 문과 7개의 옹성, 그리고 5개의 우물터와 수구지(水口址) 등을 갖춘 작지만 특별한 성곽이다. 특별하다는 것은 여느 산성과 달리 석축기법이 과학적이고 견고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인데, 전문가들은 이 산성이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곳이라며 입을 모은다.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가지런히 쌓아올린 산성은 한 칸은 가로, 한 칸은 세로로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고 내부를 돌로 가득 채운 난공불락의 요새다. 기품 있고 오가는 사람을 압도하며 당장이라도 적을 물리칠 기세다.

보은과 괴산, 청주, 청원 등 충북지역에 성곽이 많은 것은 지리적 특징과 내 땅을 지켜내고 이웃 나라의 땅을 뺏으려는 심상 때문인데 이곳은 삼국시대에 축성돼 조선까지 사용될 정도로 튼튼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다. 백제 성왕을 공격한 신라의 관산성 전투부대가 이곳에 주둔해 있었으며, 태종 무열왕이 당나라 사진을 접견한 곳도, 고려 왕건이 패퇴해 물러간 곳도 이곳이었다.

나는 서문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아미지(蛾眉池)라는 이름의 연못이 산 그림자를 품고, 햇살을 품고, 자연을 품고, 오가는 나그네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조선 시대 학자 김생의 것으로 전해지는 글씨가 주변의 암벽에 음각돼 있다. 하늘만 쳐다보며 대자연을 벗 삼고 있는 깊은 속마음을 알 것 같으면서도 멀고 험하다. 우측 성벽을 따라 남문지로 발길을 옮기니 오래된 것과 새로움이 함께 반짝인다. 1970년대 성벽 복원을 했는데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그곳에는 꽃이 피고, 생명이 움트고 있었으며, 햇살과 바람과 구름을 머금고 있었다. 무심하게만 느껴졌던 돌이었는데, 온기가 느껴지다니, 세상엔 버려지고 방치된 이들의 아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 것 같다.

300고지의 낮은 산인데도 성곽위에 올라서 보니 장대한 속리산 자락과 드넓은 보은평야와 높고 푸른 하늘과 정겨운 마을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푸르다 못해 상쾌하다.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찔하다. 거친 숨을 고르며 각다분한 삶의 찌꺼기를 털어내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여기서 여행의 백미, 진정한 여행의 가치를 느낀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동문지로 향했다. 산성에서 가장 긴 구간인 동쪽 성벽의 중간에 뚫린 문인데 옛 모습이 그대로 묻어 있다. 장군들의 호령소리와 병정들의 진한 땀내음이 느껴진다. 숨가쁘게 달려온 파발마는 하늘을 향해 히이잉~ 울부짓는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피와 땀과 눈물로 여러 날 지새웠을 이야기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다.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숲은 아름답고, 어둠은 깊다/그러나 나에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고/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잠들기 전에 가야할 먼 길이 있다"고 노래했다.

해가 지기 전에 발길을 돌려야겠다. 나도 가야할 길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못 걸은 길은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삼년산성과의 소중한 만남을 가슴속 깊이 새겨두었으니 다시 만나면 이렇게 말하리라. 너, 참, 아름답구나.

 

글 / 변광섭(에세이스트,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청주성모병원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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