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예쁜 후배 신랑은 헤어디자이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예전에는 이발사, 미용사, 깎세라고 불렀다. 사람의 머리를 깎아주는 일, 그것으로 밥벌이를 한다는 뜻이다. 후배 신랑이 다른 사람의 미장원에서 일을 하다가 독립하겠다고 할 때 두려움이 밀려왔다. 가게를 임대해야 하고 인테리어와 집기류를 준비하는데 드는 돈도 만만치 않지만 장사가 되지 않을 경우 패가망신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예쁜 후배는 신랑의 완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작심한 듯 공간을 어떻게 꾸밀 것인지, 어떤 전략으로 운영할 것인지를 노트 한 권에 꼼꼼히 정리한 상태다. 이쯤되면 반대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예쁜 후배는 신랑과 함께 미용실 분위기를 문화적으로 꾸밀 것을 약속했다. 그림도 있고 도자기도 있고 꽃도 있고 감성적인 디자인으로 편안한 공간을 연출하는 조건으로 창업의 문을 열었다.

신랑이 알아서 잘 하겠거니 생각하던 중 어느 날 미용실에 들렀다. 손님의 머리를 다듬고 있는 신랑의 모습이 진지하고 멋있었다. 머리를 깎는 사람이 아니라 최고의 아티스트라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다. 신랑이 던진 말 한 마디에 울컥했다. "나는 사람의 머리를 깎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마음을 다듬는다. 매 순간 내 손님에게 경배를 한다." 아, 이토록 멋진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나는 청주 분평동의 한 아파트에 거주한다. 아파트는 익명성과 획일성을 상징하는 거대한 마천루다. 아파트는 물질문명의 최대 수혜자이고 편리한 삶을 자랑한다. 그렇지만 이웃과의 연결고리가 없고 자연이 주는 서정과 풍요를 맛보는 것은 애당초 기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문화가 필요하고 대자연과 호흡하고 싶어하며 사람의 정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사는 아파트 옆 동의 화단은 수년째 아름답고 향기가 가득하다. 구절초, 석산, 용담, 백리향, 해바라기, 접시꽃, 초롱꽃 등 사계절 꽃들로 가득하다. 입주민은 물론이고 오가는 사람들도 꽃들의 잔치에 즐거워한다. 유독 이 아파트 화단만 아름답고 향기가 나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궁금해 한다. 이곳에 사는 칠순 할머니가 매일 새벽마다 꽃씨를 뿌리고 화단을 가꾸면서 작은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파트 생활이 무료해서 아파트 베란다에 꽃을 심었는데 이왕이면 꽃향기를 여러 사람들이 맡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화단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늙은이도 세상 사람들을 위해 값진 일을 할 수 있다는 보람에 해를 거듭할수록 당신의 화단 가꾸기는 더욱 정성이고 풍요롭다. "꽃처럼 나비처럼 바람처럼 햇살처럼 맑은 기운이 사람들의 가슴에 젖고 스미면 좋겠다." 할머니의 이 한 마디에 내 마음도 꽃으로 물들었다.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콘텐츠진흥팀장

세상의 일이란 이런 것이다. 각박하고 인정머리 없다고, 거짓과 욕망으로 얼룩져 있다고, 그래서 더욱 세상 살 맛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이 순간에도 아름다운 일들과 감동의 새순이 움트고 있다. 지난 가을에 혈당수치가 500을 넘으면서 병원신세를 져야 할 때 많은 분들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기도의 응원이, 후원의 응원이, 격려의 응원이 이어지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었다. 남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해 발목만 잡는 세상이라고 투덜거렸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한 해의 끝자락, 바람은 차고 거리는 헐렁하다. 모든 생명이 숨죽인 고요한 풍경위로 하얀 입김이 흩날릴 뿐이다. 산과 들도 앙상하다. 모든 것을 떠나보낸 이 시간, 그래서 겨울이라 부르는 것이다. 텅 빈 그곳에 천만 개의 눈송이가 태양보다 먼저 세상을 밝힌다. 아, 혹한의 계절에도 꽃은 피는구나. 사람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다. 기쁨과 영광도 있겠지만 아쉬움과 미련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삿된 것들은 흐르는 강물에 띄어 보내자. 텅 빈 그곳에 사랑의 꽃을 심자. 마음이 든든하고 이웃이 든든한 세상, 맑고 향기로운 꽃들의 잔치를 준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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