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돌고 돌아 달려왔다. 몇 개의 산을 넘었는지, 하천과 다리는 또 얼마나 길고 질겼는지 마음까지 지려왔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니 산촌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눈이 소복이 쌓였고 찬바람이 나부꼈다. 삼삼오오 쪼그리고 앉아있는 낡은 집들이 무심했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춥고 쓸쓸할 뿐이다.

시골집들은 마른 잡초가 무성했고 지붕에 검버섯이 솟았다. 감나무에 걸려있는 까치밥 몇 개가 초라했다. 돌담과 장승과 시냇물도 소리없이 움츠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왔는지 정신까지 혼미했다. 산촌의 겨울은 이처럼 적막하고 지루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은 찬 바라만 오갈 뿐이며 들은 허허롭다.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햇살마저 궁핍하다.

옥천군 동이면 청마리. 산 밑에 소곳이 엎드린 가옥들이 두세두세 모여있다. 마을 한 가운데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지금은 헐리고 몇 개의 이끼 낀 동상과 느티나무만 남아있다. 그곳에 돌탑 하나가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시름겹다. 마을의 기쁨과 영광, 아픔과 상처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차갑고 냉정한 돌무덤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싶지만 인간의 곡진한 마음은 무심한 돌부리에도 꽃을 피운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수적석천(水滴石穿),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고 했다.

옥천 청마리 제신탑

청마리 제신탑은 충청북도 민속문화제 제1호다. 막돌을 둥글게 쌓아올린 탑을 중심으로 주변에 장승과 솟대와 산신당이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곳은 성소(聖所)다. 건강과 평화와 사랑을 위해, 그들의 꿈을 일구기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곳이다. 가져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성찰하고 곳이기도 하다. 부질없는 욕망 부려놓고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꽃을 피우길 바라는 염원의 공간이다.

탑은 사찰의 삼층탑이나 오층탑과 달리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돌을 쌓아 올렸다. 마을 주민들이 산과 들과 하천의 돌을 가져와 하나씩 하나씩 쌓았다. 정월 대보름에는 모두 모여 떡과 음식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냈다. 마을사람 모두 건강하게 해 달라고, 올 한해도 풍년으로 깃들게 해 달라고, 다투지 않고 사랑하며 살게 해 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그리고 신명나는 풍물패와 함께 한바탕 놀아준 뒤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의 마음을 열었다.

돌탑 옆에 있는 솟대

돌탑 옆에 있는 솟대는 뒷산의 못 생긴 나무로 만들었다. 좋은 나무는 산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긴 장대 끝에는 새 모양으로 장식했다. 이승의 염원이 저승에까지 다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새들은 힘찬 날개짓을 하며 마을 사람들의 소망을 하늘에 전달할 것이라 굳게 믿었다. 장승도 솟대와 함께 윤달이 있는 정월이면 새로 만들어 세웠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하늘을 다스리고 땅을 다스리는 장군이다. 장승은 땅을 밟고 하늘을 향해 곧추 세우고 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우주수(宇宙樹)의 그 오랜 신화를 재현하고 있다. 수직에의 열망과 짝에의 그리움이 바로 장승이다. 한국인의 마음이자 마을의 수문장이다.

하천변과 집집마다 돌담이 있다. 돌담은 단지 안과 바깥을 나누는 상징적 의미만 갖고 있지 않다. 한국의 서정적인 농촌풍경을 담고 있으며 삶의 지혜와 기다림의 미학이 담겨 있다. 돌담 사이로 채송화와 봉숭아를 심었고 늙은 호박과 해바라기가 시골풍경을 한유롭게 하곤 했다. 담을 사이로 아랫집 윗집의 문화가 발현되지 않았던가. 돌의 크기와 모양이 다르다. 그 다름이 모여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삶의 경계이지만 시골의 정을 담고 있다. 돌담 사이로 보이는 안과 밖의 세상, 돌담 어깨 넘어 보이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이다.

사람들의 마음은 항상 헐렁하다. 그래서 두려움도 많다. 하늘을 향해 제를 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월 대보름에만 제를 올리지 않는다. 마을에 불경스러운 일이 있을 때도 제를 올렸다. 집안에 우환이 있어도 이곳에서 두 손을 모았다. 그래서 돌탑과 솟대와 장승은 이 마을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언제 누구네 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제 다 알고 있다. 다만 천기누설을 하지 않을 뿐이다. 모든 연민과 고통을 견디게 하는 신앙이 되었다,

해가 저물고 있다. 집집마다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 연기는 허공을 향해 은유의 꼬리를 물고 가물가물 피어오른다. 밥 짓는 냄새가 구순하다. 나붓나붓 떨어지는 눈발을 보니 돌아갈 길이 아득하다.

글 / 변광섭(컬처디자이너, 에세이스트)
사진 / 홍대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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