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충북 100경 - 옥천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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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부매일
  • 승인 2018.01.30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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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없는 삶의 고백… 참회와 치유의 공간

문득 이불을 개며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창조한 최초의 날, 내가 살아온 날 중 가장 아름다운 날, 그래서 내가 살아야 하는 그런 날, 살고 싶은 날, 눈을 떠야 하는 날.

새벽 일찍 잠에서 깼다. 꿈과 현실의 몽롱한 틈을 타고 찬바람이 밀려왔다. 떠나자.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든지 좋을 것 같았다. 무작정 시동을 걸었다. 나는 말이 없는 세계를 향해 차를 몰았다. 아직 어둠이 물러나지 않았다. 영화 15도, 체감온도는 영하 20도였다. 이 엄동설한에 어디를 갈 수 있을까 싶더니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성근 산들이 지나가고 텅 빈 논과 밭이 무심했다. 호수는 꽁꽁 얼어붙었는지 인기척이 없다. 그 많던 새들은 어디로 갔는지 기별조차 없다. 억새들까지 꼿꼿하게 서 있다. 북풍한설이 온 산하를 단호히 묶어 놓았다. 바람은 기어코 죄 없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렸다. 자동차를 세웠다. 문을 여니 쏴 하고 찬바람이 불어왔다.

여기가 어디일까. 냉기 가득한 바람이 귓불을 때렸다. 내 가슴을 후벼 팠다. 괜히 왔나 싶었다. 되돌아갈까 생각했지만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온 몸이 마비된 것처럼 고립되었다. 나는 침묵으로 버텼다. 왜 내게 이러느냐고, 나 좀 살려달라고 절규하고 싶었지만 소용없었다. 언덕 위의 소나무 숲 사이로 하얀 건물과 십자가가 얼핏 보였다.

나는 지금 옥천 읍내에 있는 성당 앞에 서 있다. 새벽 미사를 보려는 사람들이 하나 둘 성당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찬송가와 매일미사 책을 손에 쥐고 들어가는 뒤태가 가볍지 않았다. 저마다 말 할 수 없는 사연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교회를 가는구나. 아, 나도 세례자다. 세례명이 토마스 아퀴나스다. 이탈리아의 신학자이며 종교철학자의 이름을 딴 것이다. 단테는 '신곡'이라는 책에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이야기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적 기반위에 쓰였다.

옥천성당은 1940년대에 지어졌다. 메리놀외방선교회 소속의 페티프렌(R. Petipren) 신부가 재임할 때다. 작은 동산 위에 시멘트 벽돌을 사용해 지었는데 신도들이 십시일반 기부했다. 어디 기부뿐이던가. 벽돌 하나하나를 신도들이 직접 쌓아 올렸다. 그들의 애달픈 사연과 꿈을 차곡차곡 쌓았다. 지붕은 왕대공형식이 변형된 목재 삼각형 지붕틀 구조와 함석으로 마무리했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함께하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등록문화재 제7호다.

건물은 단층이니 아담하고 소박했다. 하얀 외벽이 순결을 다짐하듯 반짝였다. 성모마리아와 함께 단정하고 따스했다. 마음을 비우고 고해성사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신도들을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고 깊이가 있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고난의 길 14처가 좌우 벽에 세어져 있었다. 햇살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어린 복사가 제대위의 성초에 불을 지폈다. 풍금소리가 나고 신도들이 성가를 부르자 신부가 입장했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내 생의 난폭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왜 그랬을까. 독립운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치열했을까. 삶의 여백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상처가 더 깊다. 욕망으로 얼룩진 내 안의 모습이 끼쳐왔다. 나는 그것이 책무이고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그 정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큰 일 날 것처럼 스스로를 닦달했다. 착각이었다. 그것은 집착이고 아집이었다. '아멘' 소리에 눈물이 쏟아졌다.

어디선가 낮은 소리가 들렸다. 가난하게 서라. 아픔을 딛고 일어서라. 내 삶의 상처는 위대한 창조의 건배, 그러니 바람 부는 날 집을 짓고 눈 오는 날 생명의 씨앗을 뿌려라. 내 안에 잠자고 있는 작은 영혼을 눈 뜨게 하라. 회개하고 참회하라. 고백하고 용서하라. 구걸하지 말라. 피와 땀과 눈물로 증거하라….

밖으로 나와서 성당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잔디밭을 걸었다. 소나무는 늙어도 푸르고 한 겨울에도 향기가 난다. 소나무 숲 사이로 하얀 성당이 더욱 눈부셨다. 옥천읍내가 한 눈에 펼쳐졌다. 내 몸의 오래 묵은 때가 씻긴 듯 발걸음이 가벼웠다. 인생은 길 없는 숲과 같아 방황과 번뇌로 뒤척이는 날이 많다. 그럴 때는 잠사 삶의 여백을 찾아 나서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말 없는 여행 말이다.

글·사진 / 변광섭(컬처디자이너,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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