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탈망기 소리 돌아가는 소리가 아늑하게 들린다.

"옛날엔 도리깨로 했어. 그리곤 바람을 이용해 키질을 했지."

마을 어르신의 말을 듣고 보니 비닐하우스 바닥에 쫘악 펼쳐진 토종 볍씨들의 양에서 압도감이 온다. 농기계로 하면 그리 부담이 안되지만 일일이 손과 작은 도구로 하면 다를 것이다. 올 봄의 모내기와 가을 추수를 할 때 손과 낫으로도 했는데 넓은 논 전체를 농기계 없이 했더라면 아찔한 일이다.

볍씨 소독과 못자리, 모내기 등을 통과한 벼는 여름의 긴 장마와 태풍을 겪었다. 쓰러지기도 살아남기도 해 추수에 이어 탈망 즉 까락을 제거하는 것이다. 식용과 판매를 위해 도정 할 볍씨들은 별도로 저장되어 있다. 지금 탈망기를 거치는 볍씨들은 내년에 심을 종자들이다. 벼농사의 한 해를 처음부터 거의 끝까지 바라보는 일이 의미있어 보인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 말로 쓰인다. 그 문장을 다른 식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문득 인다.

벼는 씨앗으로 심겨 하늘을 향하다가 노랗게 익어 무거워지면 숙인다. 근데 벼 안의 씨앗 입장에서 보면 원래 고향인 땅을 향하고 있다 벼는 하늘로 오르다가 숙이며 소멸로 가지만 그 안의 씨는 땅에서 하늘로 향했다가 다시 땅으로 향하는 것이다. 상승과 하강이다. 순환이기도 하다. 벼가 나서 죽는 동안 그 안의 씨는 땅과 하늘을 연달아 뚫으며 동그랗게 한 바퀴 돈다.

볍씨가 우주적 곡예를 하는 이미지가 그려진다. 벼 베어낸 논에 우주적 곡예가 다음의 곡예를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우주에 과연 직선이 존재하는가. 최근에 스친 생각이다. 산에 오르거나 강을 바라봐도 직선은 눈에 띄지 않는다. 나무들은 모두 휘어지고 풀잎의 잎맥 하나 직선의 형태를 띠진 않는다. 강물도 유연하게 흐른다. 구름에도 직선은 보이지 않는다. 자연엔 곡선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귀납법에 속하는 문제이기에 우주 전체를 일일이 볼 수 없는 한계 속에선 진리라고 보긴 어렵다. 육안이나 경험치로 보자면 그럴 개연성이 큼은 분명해 보인다. 미시적 차원에선 또 모를 일이지만 말이다. 과학도가 아닌 내게 스친 이 생각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알 수 없다. 나의 직관으론 직선은 인간이 창조한 것 같다.

서양 문명은 직선이 강하고 동양 문명은 곡선이 강하다고 한다. 물론 상대적인 이야기이다. 우리가 사는 현대 문명에 문제가 심각하다고 하는데 왜일까. 서구식 과학주의, 효율성 위주의 사고 등등 숱한 것들이 원인일텐데 그 바탕에 직선적인 사유 또한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된다.

문명과 그 안의 인간들이 함께 신음하는 지금, 직선에서 곡선으로의 방향 전환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밑그림이 될 것이다. 시급하고 절실한 일이다. 순환, 생태계 등등 현대의 의미 있는 가치들은 곡선을 품고 있다. 물론 직선의 가치 또한 재해석되고 재활용되어야 한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온갖 드라마를 겪은 후 볍씨들을 품고 고개를 숙인 벼. 겸손의 미덕이라는 이미지를 오래도록 간직한. 그 벼를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스스로는 소멸로 가지만 품고 있는 씨앗만큼은 새로운 탄생을 위한 순환의 리듬 속에 있다. 자그마한 씨앗 하나에 인류가 가야할 미래마저 담겨있음이 신기하다. 내년에 논을 다시 장식할 볍씨들의 까락을 벗겨내는 탈망기의 소리가 가을 오후를 아름답게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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