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노인 문제에 대해 숱한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노인학이라는 학문도 오래 전에 탄생해 발전해나가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도록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가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사회적으로서나 노인 한 분 한 분의 실존적으로서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노인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은 그다지 깊지 않다. 단 이런 이야기는 가슴에 품고 있다.

나의 아버지는 89세이다. 당신의 부친은 43세, 당신의 조부는 65세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부친이 돌아가신 나이보다 더 살기 시작했을 때 삶이 의아했다고 말했다. 부친보다 더 많이 살게 된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66세 되신 해부터 아버지는 자신의 조부보다 더 오래 살기 시작했다. 당신의 부친이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넘어 당신의 조부가 살아 보지 못한 시간을 사는 것이다. 올해만 하더라도 아버지는 당신의 부친과 조부가 산 삶보다 수십 년을 더 살고 있다.

나의 아버지에 국한된 이야기일까? 이 시대를 사는 노인들의 이야기이며 앞으로 노인이 될 모든 사람들의 특색일 것이다. 단순해 보이는 이 이야기 속엔 깊은 함의들이 담겨 있어 보인다.

말을 바꿔 말해 보자.

이 시대의 노인들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사는 것이다. 과거의 노인들은 대개 자신의 부친이 산 삶과 비슷한 시간의 생애를 살았을 듯하다. 인류가 탄생된 후 바로 앞 세대까지 이런 패턴에 가까웠을 것같다. 과학과 의료, 복지의 발전에 힘입어 지금은 이런 것과 변별된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부친이 산 생애보다 오래 사는 현재의 노인은 마치 잉여같기도 한 시간의 그 국면에 대해 낯설고 두렵고 막막할지도 모른다. 충분한 성찰이 어려울 수 있다. 그에 대한 흡족한 담론은 형성되어 있지 않은듯하다.

노인의 고독은 이런 이유로도 더 깊을 수밖에 없다. 노인들은 해마다 새로운 대지로 진입해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에 있어본 적 없는 시간대로 떠밀리는 것이기도 하다. 그에 따른 실존적, 존재론적, 감각적 느낌들은 천차만별로 다 다를 것이다.

이 시대의 노인들이 겪는 또다른 중대한 경험 중의 하나는 손주들과의 분리이다. 과거의 노인들은 대가족을 통해서든 마을 공동체를 통해서든 손주 내지 그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과도한 발전으로 인해 인류 사회가 저급한 욕망 구조에 맞게금 변형된 현대에 노인들은 사랑스런 그들과 거의 단절되어 있다.

인류 역사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추가로 더 살면서도 자신의 씨앗의 씨앗들인 따스한 피붙이들과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에 따른 고독감은 말로 형용되기 어려울 것이다.

연금, 건강, 사회복지, 취미 생활…, 노인 문제의 주내용을 이루는 것들이다. 노년생물학, 노년심리학, 노년사회학, 노인병학, 노년사회복지학은 노인학의 주요 커리큘럼들이다. 노인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깊어가는 상황에서 가난, 질병, 소외, 죽음에의 공포 등으로 인한 노인들의 그늘은 더욱 깊어가고 고독사도 늘고 있다. 노인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중요 과제 중의 하나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노인 문제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런 생각이 노인 문제에 대한 의미 있는 관점이 될 가치가 있다고 보인다. 전문적인 연구가들이 그런 목소리를 내면 두 손 들어 환영할 것이다. 노인 문제에 대한 담론에서 혹시 누락되어 있다면 첨가하는 것이 노인에 대한 연구만이 아니라 노인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바람직한 길잡이가 되리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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