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추분(秋分)을 지났어도 나라가 온통 어수선하다. 정치는 나라의 기본이다. 정치계가 내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은 뒷전에 팽개치고 난리치니 일상의 삶이 매끄럽지 않다. 추분에서 방점을 찍은 것은 추(秋)가 아니라 분(分)이다. 일년 절기는 동지와 하지에 쓰이는 지(至), 춘분과 추분에 쓰이는 분(分), 입추, 입동에 쓰이는 입(立) 이 세 개가 골격이다. 지, 분, 입의 토대 위에 절기가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지(至)는 이른다는 뜻이다. 가령 동지는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때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동지를 일양시생(一陽始生)이라 해서 비로소 하나의 양이 탄생되는 시기로 본다. 분(分)은 나눈다는 뜻이다. 추분에선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 추분부터 밤의 길이가 점점 커져서 동지 때 맥시멈이 된다. 이 지(至)와 분(分)이 24 절기에서 직각으로 만나는 두 개의 지름이 된다. 그 정중앙으로 네 개의 지름이 지나는데 그것이 입(立)이다.

추분에서 분(分)에 방점을 찍은 이유는 분(分)에 절도의 뜻이 머금어 있어서이다. 지(至)에도, 입(立)에도 절도가 담겨 있다. 일년의 절기에서 지(至), 분(分), 입(立)으로 구성된 것이 8개이다. 일년 절기 24개의 3분의 1이다.

지분입(至分立). 절도 성격을 지닌 이것을 나는 철학적이라고 말하고도 싶다. 음과 양은 동양적 시간관의 기본이다. 동지 이후 음은 양으로 바뀌면서 봄의 계절로 이어지는데 이처럼 음의 극에 이르른 후에 극즉반으로서 양으로 변환되는 이치가 숨어 있다. 다시 말해 절도와 순환은 시간의 비밀이랄 수 있다. 부드럽게 흐르는 것만 같은 시간에 순환도 있고 흐름과 순환이 가능하도록 절도가 음과 양의 양극적 요소로 이뤄져 그 모든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절기에 대해 장황하게 해석한 이유는 우리나라의 정치가 자연의 질서에 너무도 어긋나게 흐르는 것에 따른 절망과 분노, 개탄 탓이다.

정치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분기점이 있다. 절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선거이다. 특히 내년 대선은 여야를 불문하고 중요한 게 사실이다. 여야 모두 승리하기 위해 매진한다. 어느 정도 그럴 경향은 인정한다. 그러나 정치에서 정작 소중하게 여겨야 할 사회, 문화, 인간, 인간의 삶 등이 실종되다시피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여전히 기승을 떨어 국민들의 일상이 심각하게 훼손된 상황에서 말이다.

고대의 정치는 절기를 중요시 했다. 현대 정치는 절기와 무관한 방향으로 진화됐다. 그런데 문화심리학에 따르면 우리 인간의 몸엔 아득한 구석기 때부터의 체험이 배여 있다. 농경 생활도 오래 해온 바 농사와 직결되는 24 절기에 어우러지는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자연의 리듬에 어울리는 인체의 이 리듬을 정치가 무시할 때 정치는 국민에게서 멀어질 뿐이다. 추분을 넘었으니 한로가 가까이 온다. 찬 이슬이 맺혀 추수를 마쳐야 하기에 타작이 한창인 시기다. 정치가들은 신경이나 쓰는가. 한로 다음엔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상강이다. 그 다음은 입동이다. 날이 추워진다. 추위를 더 탈 소외계층에 대해 깊은 고민과 실천 방안을 진정한 마음으로 정책화하려는 정치가는 과연 얼마나 되는가?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절기는 보름 정도마다 새롭게 바뀐다. 정치가들이 이제라도 이 보름에 마음을 기울인다면 상처 투성이의 국민 가슴에 보람의 샘물이 깃들 것이다. 그것은 후진적인 정치구조를 선진화시킬 원동력이 된다. 멀리 있는 대선만을 향하지 말고 당장 앞에 올 절기들, 하루에도 절기가 있다고 할 수도 있으니 그 소중한 것들에 말이다. 일상에 주목하는 것이 길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