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어김없이 그날은 왔다. 지난해 말에 나는 35년에 걸친 공직생활을 마감하였다.

스물여섯의 나이에 입직하여 회갑을 맞는 해에 은퇴하였으니 인생의 대부분을 공직에서 보낸 셈이다.

얼마 전 퇴임을 앞두고 오랜만에 고향 제천을 찾았다.

옛시조에'산천은 옛날 그대로인데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구나'라고 했던가? 20년 만에 찾은 고향은 옛사람은 없고 산천도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월이 이렇게 무심히 흘렀나 보다.

문득, 1천300년 전 당나라 현종 때의 시인 하지장(659~744)의'회향우서(回鄕偶書)'란 시가 생각났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후 35세에 고향을 떠나 벼슬길에 올랐다. 측천무후 때 벼슬길이 순조로워 예부시랑과 태자 태부까지 지내고 나이가 들어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하였는데 그의 나이 80대였다. 50년 만의 귀향이다.

그런데 그가 고향에 돌아오니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잡초가 우거진 옛집 기둥에 기대어 늙어서 고향에 돌아온 감회를 시로 표현한 것이 회향우서이다.

 

젊어서 집 떠나 늙어서 돌아오니

고향 말씨 그대로인데 귀밑머리는 허여졌네

아이들 쳐다봐도 서로를 알지 못하여

웃으며 따라와 어디서 온 나그네냐고 묻더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벼슬길은 험난하다. 도연명이 살던 중국의 4~5세기는 난세였다. 자유로운 영혼의 시인에게 벼슬살이는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을 것이다. 도연명은 하급관리로 있었는데 적응이 안돼 늘 전원으로 돌아가기를 입버릇처럼 되뇌였다. 그가 전원으로 돌아가면서 소회를 읊은 것이 그 유명한'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전통시대 귀거래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하나는 벼슬살이가 맞지 않아 전원으로 돌아가 농사나 짓고 싶은 마음과 또 하나는 간신배가 득실되는 혼란한 조정에서 벼슬하고 싶지 않은 항거의 뜻도 있었다.

 

나 돌아왔도다!

세상과의 사귐도 속세의 어울림도 단절하리라!

세상과 나는 서로 인연을 멀리했으니

다시 벼슬길에 나간들 무엇을 얻겠는가?

친척 이웃들과 즐겁게 정담을 나누고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시름 달래리


옛사람들은 학문과 벼슬을 같이 하는 사대부였다. 바쁜 벼슬살이 중에는 학문을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물러나면 다시 학문의 길로 돌아갔다. 이때 그들이 은거하면서 학문과 수양을 하고 교육을 했던 곳이 서원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에 묻혀 유유자적하는 삶을 희구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처사, 선비, 은일이라 했다.이들은 주로 경치 좋은 산림이나 계곡 등에 정사(精舍)를 짓거나 정자를 지어 기거하면서 음풍농월하며 지냈다.

강가나 시냇가에 정자를 짓고 시원한 바람을 쐬며 서책을 읽는 한량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부러운 인생이다.

한명회(1415~1487)는 세조를 임금으로 만든 일등 공신이고 두 딸을 임금에게 출가시킨 임금의 장인이며 영의정을 역임한 당대 최고의 권세가였다. 그런 한명회조차도 은퇴 후 자연을 동경해서일까, 한강 변에다 정자를 지었는데 이름하여 압구정이다.

압구정(押鷗亭)을 풀이하면 갈매기와 친해지고 싶어 강가에 지은 정자란 뜻이다. 권신이 왜 갈매기와 친해지려고 하나.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겠다는 한명회의 속내는 무엇일까? 정변을 통해 사직을 안정시키고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므로 이젠 은퇴해서 자연을 벗 삼아 살 것이니 사심 없는 충정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었을까.

한경지략 기록에 의하면 한명회가 압구정을 만든 것 뜻은 북송 때의 재상(1008~1075)의 고사에 빗대어 자신이 조용히 물러났다는 명성을 얻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그래로 나름대로 은퇴의 변을 남긴 것이다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나아감이 있으면 물러남이 있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이다. 옛날보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으니 요즘의 60세 은퇴는 인생의 종착은 아니다. 은퇴는 1막이 끝나고 2막을 시작할 때이다. 60대의 인생 2막은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추구하고, 그동안 못했던 것을 이루어 인생을 후회 없이 잘 마무리할 수 있게 신이 우리에게 부여해 준 마지막 선물이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은퇴는 내게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하는 설렘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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