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펼쳐 읽은 흔적 있지만 보존상태 완벽"

 

편집자

현존하는 금속활자 인쇄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이하 직지)이 반세기 만에 수장고를 나와 전 세계 관람객에게 선보이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프랑스국립도서관은 지난 12일(현지시간)부터 7월 16일까지 열리는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행사에서 직지를 전시중이다.
직지가 50년만에 일반 대중에 공개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대표이사가 직접 방문했다.
중부매일은 변 대표의 관람기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직지 원본을 관람하는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대표
직지 원본을 관람하는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대표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리움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꽃이 피더니 바람의 현을 타고 꽃가루가 날렸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 간절함을 비행기에 싣고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꼬박 하루 걸렸다. 하긴 오십 년 만에 자신의 속살을 공개하는 것이니 청주에서 파리로 가는 하루는 지루하지 않았다. 되레 설렘과 기대로 가득했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650여 년의 향기가 끼쳐올지 앙가슴 뛰었다. 낯선 땅에도 꽃은 피어 한사코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었다. 봄비를 맞으며 목적지인 프랑스 국립미테랑도서관으로 향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내 가슴은 크게 요동쳤다. 국립미테랑도서관은 미테랑 대통령이 재임하던 시절 1988년 세계에서 가장 크고 현대적인 국립도서관을 짓겠다고 선언한 뒤 7년 동안 12억 유로의 건축비를 들여 완성했다. 센강 변에 20층짜리 대형 건물 4개가 책을 반쯤 펼친 모습이 인상적이다. 4개의 건물은 각각 시간, 법률, 문자, 숫자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계의 기록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2023년 4월 11일(현지시간). 역사는 오늘을 직지의 재탄생을 기념하는 날로 기록할 것이다. 말로만 듣던 직지 원본이 공개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직지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직지를 본 사람은 거의 없다. 프랑스 정부는 그동안 직지 원본을 안전 등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서 두 눈으로 보게 되다니 감격, 감동, 감탄 그 이상이었다.

국립 미테랑도서관 내부 전경(1층 로비)
국립 미테랑도서관 내부 전경(1층 로비)

직지의 전격 공개는 50년 만의 일이다. 1973년 같은 곳에서 열린 '동양의 보물' 전시 이후 실물 공개는 처음이다. 미테랑도서관은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Imprimer! L'Europe de Gutenberg)'을 주제로 한 인쇄문화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첫 번째 세션에 직지를 소개했다. 직지가 유럽인들의 자긍심인 구텐베르크 등의 인쇄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전시다. 직지가 구텐베르크 42행 성서와 함께 전시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 채수희 문화재활용국장이 직지 원본을 관람하고 있다.
문화재청 채수희 문화재활용국장이 직지 원본을 관람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이범석 청주시장과 문화재청 문화재활용국장, 주프랑스대사, 주프랑스문화원장, 그리고 조계종 총무원 사회부장과 파리에 있는 길상사 주지스님 등이 감격의 순간을 함께 했다. 수많은 언론도 주목했으며 유네스코 본부 간부진도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인쇄문화 시연장면
구텐베르크의 유럽 인쇄문화 시연장면

이날 행사에서 미테랑도서관 로랑 엥겔 관장은 "청주시의 협력과 노력이 없었다면 이번 전시는 열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직지가 인류의 인쇄문화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에 따른 책무를 무겁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를 고심하던 중 금속활자 직지의 역사적 가치와 인쇄문화의 특징, 그리고 직지라는 책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 기획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직지의 겉표지와 속 내용, 그리고 인쇄문화의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직지의 복원과정을 영상으로도 소개했다.

직지 원본 내지 전시장면
직지 원본 내지 전시장면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직지 원본을 펼쳐 전시한 그 지면이 주는 상징성이다. 색공불이(色空不二), 선악불이(善惡不二) 등 불교의 가르침을 소개하는 문구가 혼돈의 이 시대에 주는 메시지 같았다. 활자체 사이에 색으로 방점을 찍고 손으로 쓴 글씨가 있으니 분명히 누군가 이 책을 읽고 사용했던 흔적이다. 겉표지는 소장자의 이력이 적혀 있었다. 보존상태는 얼마나 완벽한지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고려시대 청주는 세계 최고의 활자와 종이를 생산했던 것이고, 붓·먹·벼루 등을 만들었던 곳이다. 세계 으뜸의 공예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문화재청과 미테랑도서관의 업무협약식 장면
한국의 문화재청과 미테랑도서관의 업무협약식 장면

미테랑도서관장은 협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그간 청주시의 노력과 헌신을 고맙게 생각한다고 했다. 직지원본의 과학적 분석과 체계적인 복원, 그리고 기록화 및 금속활자 복원 등에 청주시, 충북대학교가 참여했고 프랑스 정부와 프랑스 자연사박물관 등이 함께했다고 말했다. 한국어로 된 전시 리플릿은 한국과 청주시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담겨 있다. 유럽에서 한국어로 된 리플릿을 제작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의 연표에 1377년 직지가 소개돼 있다.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의 연표에 1377년 직지가 소개돼 있다.

전시회는 엄숙했고 분명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유럽의 인쇄문화를 소개하는 전시지만 그 중심에 아시아, 특히 한국이 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리는 전시였다. 전시장에 있던 최재철 주프랑스 대사는 "지금 우리는 인류 최고의 유산을 보고 있다"며 "감개무량하다. 직지에 대한 세계인의 사랑과 관심이 싹트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 장면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 특별전' 장면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대표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대표

알려진 대로 직지는 구한말 프랑스 외교관 콜랭 드 플랑시가 한국에서 구입한 뒤 자국으로 가져갔다. 이후 경매를 거쳐 1950년 프랑스도서관에 기증됐다. 책 표지에 '주조된 글자로 인쇄된 책으로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한국 책, 연대 1377'이란 플랑시의 친필이 남아 있다. 플랑시가 구매 당시 직지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그리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직지를 처음 소개했다. 고종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 1902년 오얏꽃 무궁화로 디자인한 태극훈장을 수여했다. 직지는 구텐베르크 성서(1455년)보다 78년이나 앞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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