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종수 건국대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은 75세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평균 수명으로 볼 때 짧은 인생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18년을 유배지에서 보냈고 정조 사후 전전긍긍하며 지냈던 세월을 생각하면 안락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는 없다. 40세에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유배지에서 독서와 저술로 모진 세월을 견디었다. 정약용에게 있어 저술은 실존의 문제이며 언젠가 다가올 새 역사를 기약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찬 묘지명에서도 그것을 명확히 하였다. 유배 이후 다산의 시문은 침울하고 비장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에게 과연 젊은 날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다 여유당전서에서 정약용의 젊은 시절 활달한 호기(豪氣)가 넘치는'유세검정기(游洗劍亭記)'를 읽게 되었다.

정약용은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6년 후인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유세검정기'는 다산이 벼슬길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은 30세 젊은 날에 동료들과 세검정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추억을 기록한 글이다. 북한산 계곡에서 발원한 맑은 물줄기가 모인 홍제천이 이루어낸 세검정 일대의 경관은 수려하기로 예부터 소문났다. 세검정 바위 위에는 정자가 있는데, 겸재 정선(1676~1759)의 노년작 <세검정도>에 정자가 나오므로 1750년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산은'유세검정기'에서 세검정의 빼어난 풍광은 소나기가 쏟아질 때 폭포를 보는 것인데, 사람들이 비가 내릴 때는 교외로 나가려 하지 않아 푸른 숲 사이에 있는 정자의 빼어난 경관을 만끽한 사람이 드물다고 적었다. 서른 살 다산의 젊은 날 초상은 어떠했을까? 글을 인용해 본다.

〔때는 신해년(정조 15년/1791년) 여름의 일이었다. 나는 동료들과 명례방에 모였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무더위가 찌는 듯하였다. 먹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마른 천둥소리가 은은히 들렸다. 내가 술병을 치우고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건 폭우가 쏟아질 조짐일세.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는가? 만약 내켜 하지 않는 사람에겐 벌주 열 병을 한꺼번에 주겠네."모두,"여부가 있겠나."하며, 동감을 표시했다.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창의문을 나섰다. 비가 벌써 몇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내달려 정자 아래 수문에 이르렀다. 양편 산골짝 사이에서는 이미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하였다. 옷자락이 빗방울에 얼룩덜룩했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벌여놓고 앉았다. 난간 앞의 나무는 뒤집힐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상쾌한 기운이 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 물이 사납게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를 메워버렸다. 물결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 흘러갔다. 모래가 일어나고 돌멩이가 구르면서 콸콸 쏟아져 내렸다. 물줄기가 정자의 주춧돌을 할퀴는데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난간이 온통 진동하니 겁이 나서 안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자, 어떤가?"하니, 모두들,"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고 하였다.

술과 안주를 내오라 하고 돌아가며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비는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 물도 잦아들었다. 석양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물상들이 온통 자줏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서로 더불어 베고 누워서 시를 읊조렸다.〕

한 편의 맛깔스러운 수필을 읽은 느낌이다. 세검정에 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산의 젊은 날 호기가 한눈에 선하게 그려질 것이다. 이날 만난 이들은 꽃이 피면 모이고, 눈이 내리면 모이는 그런 가까운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붓과 종이 그리고 술을 준비하고는 거나하게 한 잔씩 들며 시를 읊조렸다. 예나 지금이나 청춘일 때 있을법한 낭만이다.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다산의 젊은 날 모습을 보면 10년 후 그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줄 누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때는 정조 15년(1791년) 여름으로 5~6월경이었을 것이다. 다산은 그때 사간원 정원(정6품)으로 있었다. 이해 10월에 윤지충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 배격 운동이 일어났고 다산은 형 약전과 함께 배교(背敎)를 하였으나 서학 문제는 이때부터 그의 인생을 휘감았다. 어쩌면 세검정에서 노닐었던 즐거움이 인생에 있어서 마지막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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