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메고 다니는 가죽 가방에서 가방과 가방끈을 잇는 쇠고리가 떨어져 나간 적이 있다. 똑같은 쇠고리를 구해 끼워 맞추는 게 상식일텐데 일단 그러기가 귀찮았다. 가방을 버리고 새 것을 사자니 아깝기도 하고 과해 보였다. 뭔가로 고리를 만들면 될 것 같았다. 주변에서 찾다보니 천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쓰지 않는 것이었다. 손잡이를 가위로 잘랐다. 그것으로 고리 부분에 묶었다.

쇠고리 두 개 중 한 개가 더 고장났다. 지난 번의 천가방을 떠올렸으나 굳이 같은 걸로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다른 천을 구해 가위로 오려 고리로 삼았다.

서로 다른 천고리로 된 가방을 매고 다니는 것에 나는 별 창피함이 일지 않았다.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색다른 맛이 낫고 나만의 가방이 된 느낌도 들었다.

내 가죽 가방이 낡아서인지 지퍼도 고장났다. 고리와 달리 당장 고치지 않아도 큰 일은 아니기에 방치한지 2년 정도 지났다. 지퍼 고장으로 가방이 5 센치 정도는 늘 열려 있다.

이대 앞을 지나다가 가죽 공방이 많이 있는 곳이기에 한 곳을 찾아갔다. 지퍼 수선을 하는데 사 만원 들어간다고 한다. 할까 하다가 돈도 아깝고 지퍼 부분이 조금 벌어진채 다니는 것도 내 감각을 묘하게 건드려왔기에 그냥 그대로 쓰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노트북은 빠질 리 없고 자잘한 것들은 빠져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기억도 흘리고 가끔 눈빛도 흘리고 다니는데 가방이라고 완전히 보수적일 필요가 있는가. 옛날에 보자기건 등짐으로 다닐 땐 뭐라도 빠지지 않도록 꽁꽁 여몄겠지만 구조 자체가 구멍도 머금은 거라 통풍 좋은 대청 마루나 바람 스미는 한복, 공기 투과되는 항아리나 투배기의 멋도 버무러져 있다. 바람도 드나들고 거스름돈으로 받아 쑤셔넣은 백원짜리 동전이든 싸구려 볼펜이든 저 고장난 지퍼 사이의 틈을 통해 흘러나가라. 그런 호기를 부리는 마음도 싫지 않았다. 난 보자기 메듯 저 가방을 메고 다닌다. 의미들이 푸짐히 담기면 생명인듯 되니까. 호기 투의 저 앞글에 이어 이런 포스팅으로 페북에 올리자 재밌다는 반응이 제법 되었다. 사회가 너무 조여지고 틈새가 용납이 안되는 분위기가 되었기에 실없이 헐렁한 내 글과 삶이 환풍구 하나쯤 되는 모양이었다.

나는 물건들을 거의 사지 않는다. 돈을 제법 벌 때도 생활비 외엔 책값과 밥값, 간혹 술값 정도 나갈뿐이었다. 옷도 사는 일 없고 가방을 사지도 않는다. 구두쇠도 아니고 절약형도 아니다. 여행 갈 일이 있으면 기차표를 끊든 비행기 표를 끊든 쓸 건 다 쓴다. 적은 돈이지만 아무리 어려워질 때도 몇 의미 있는 기부는 차마 끊질 못해서 이어 왔다. 난 소비를 하되 소비의 방향이 다를뿐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나 같은 사람이 많으면 자본주의가 돌아가지 않는다. 세계가 안 돌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세계는 또다른 리듬으로 어쩌면 신체 리듬과 보다 걸맞는 리듬으로 돌아간다.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수공예 하는 분들도 훌륭해 보인다. 수공예 자체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기성품에 손작업이 가미되어도 좋을 듯 하다. 고장난 가죽 가방에 천으로 고리를 엮어댄 내 행위는 간단하고 사소한 손작업이지만 그걸로도 물건에 자아가 작게나마 배이는 느낌이다. 내 가죽 가방의 수공예적 손질에 대해 지금껏 누구도 물은 적 없지만 만약 묻는다면 난 주절주절 서사를 풀 수 있다. 저 가방의 서사의 시작은 깊게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내 수작업이 개입된 시점은 내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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