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조선의 제12대 왕 인종(仁宗)은 이름 그대로 참 어진 임금이었다. 명군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학자적 군주였으며 지극한 효자였다. 그런데, 너무나 착하고 효성스러운 그의 성품이 도리어 수명을 단축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인종은 8개월간 왕위에 있었는데, 부왕인 중종이 돌아가자 상중에 너무 슬퍼하다가 기진맥진하여 승하하였다. 인종실록을 보면, 상중에 자식으로서 애통해하며 지극정성으로 효를 다하는 인종의 수척한 모습과 그런 임금의 건강을 염려하는 신료들이 간언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인종은 총명하였고 세자로 25년을 지내면서 군왕으로서의 품격과 학문을 닦은 준비된 군주였다. 그런 군주가 상장례에 과도하게 몰입하다가 건강을 해쳐 갑자기 돌아갔으니 왕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사림(士林)들은 허망했을 것이다. 인종의 승하에 누구보다도 애통해하며 비탄에 젖은 신하가 있었는데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이다.

인종이 1515년생이니 둘의 나이 차이는 다섯 살로 하서가 연상이다. 김인후는 31세 되던 1540년(중종 3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간 후 1543년 4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의 설서(정7품)에 임명되어 세자인 인종과 인연을 맺었다. 하서는 인종의 세자 시절 글공부 스승인 셈이다. 이때 하서의 나이 34세였고 세자는 29세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서로 잘 맞았고 예우했다. 하서는 세자가 성군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경왕후는 아들 인종을 낳고 7일 만에 산후통으로 승하했다. 인종은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 자랐으니 고아나 다름없었다. 계모인 문정왕후는 아들 경원대군(훗날의 명종)을 낳은 후 세자를 박하게 대했으므로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외롭고 마음고생을 많이 하며 자랐다. 이러한 때 마음에 맞는 벗을 만났으니 인종과 김인후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했을지 짐작이 간다.

1543년 1월 7일 삼경, 동궁에 불이 났다. 실록에 의하면, 이날의 화재는 세자의 거처인 자선당이 완전히 소실될 정도로 대형화재였다. 다행히 세자는 왕과 같이 대내에 있어서 무사하였으나 이날 밤의 화재는 실록에서'해괴한 일'이라고 기록할 정도로 의외였다. 화재의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후일 경원대군의 외숙인 윤원로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화재 등으로 어수선하고 심란한 시간을 보내던 세자는 5월 어느 날 스승이며 벗인 김인후의 당직 날에 맞춰 세자시강원을 찾았다. 회포도 풀 겸 그에게 선물을 주려고 기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밤중에 자신을 찾아온 세자를 보고, 하서는 놀라고 기쁜 마음으로 맞이했다. 세자는 하서에게 선물을 내밀었다. 먼저, 싱싱한 배 3개를 주었다. 하서는 이 중 한 개는 맛을 보고, 나머지 두 개는 보자기에 잘 싸서 간직했다가 집에 돌아가서 어머니에게 드리고, 그 씨는 받아두었다가 밭에 심었다고 한다.

두 번째 선물은 하서에게 특별히 하사했다는 <주자대전> 한 질이다. 성리학의 전범인 주자대전은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신간이었다. 주자대전은 선조 대에 이황과 기대승이 발췌하여 편찬하기 시작하였고, 1573년(선조 6년)에야 교서관에서 간행하여 국용(國用)으로 사용했으므로, 이때 하서가 받은 주자대전 선물에는 세자의 각별한 뜻이 깃들어 있었다. 성리학자인 하서에게 주자대전보다 더 반가운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세자의 마음 씀씀이에 하서는 감읍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 선물이 바로'묵죽도(墨竹圖)'이다. 문인화를 잘 그렸던 세자는 비단(종이) 위에 직접 대나무를 그려 하사했다. 대나무가 절벽과 골짜기 사이에서 솟아나 곧게 하늘을 떠받드는 형세이다. 하서는 묵죽도 하단 왼편에 화답하는 시를 적어 세자에게 자신의 충심을 표현했다.

뿌리, 가지, 마디와 잎새, 모두 완전하여

돌처럼 굳은 벗의 정신이 깃들었네.

조화를 바라시는 임금의 뜻을 이제 깨달으니

천지에 한결같은 마음 어길 수 없도다.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석우(石友)정신이 그 안에 깃들었네'라는 구절에서 군신 관계인 인종과 김인후의 막역함을 엿볼 수 있다. 인종의 묵죽도는 광해군 대에 목판으로 제작되어 인본이 유포되었다. 훗날 김인후의 열혈 팬을 자처했던 정조는 인종과 김인후의 아름다운 군신 관계 이야기를 듣고 장성 필암서원에 친히'장경각'(藏經閣)이란 이름과 글씨를 써서 하사하며 묵죽도 목판을 보관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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