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7월은 여름의 한복판이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 때문에 어디 다니기가 힘들다. 이럴 때 그리운 것이 시원한 나무 그늘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림자도 쉬어간다는 담양의 식영정(息影亭)을 찾았다. 식영정을 글자대로만 해석하면 그림자도 쉬어가는 시원한 휴식처라고 해석할 수 있으나 실은 오묘한 철학적 의미가 깃들어 있는 정자 이름이다.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기 그림자를 두려워하고 자기 발자국을 싫어하여 그것을 떨쳐내려고 달려 도망친 적이 있었는데, 발을 들어 올리는 횟수가 많을수록 그만큼 발자국도 더욱 많아졌고 달리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그림자가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달리기가 아직 더디다고 생각해서, 쉬지 않고 질주하여 마침내는 힘이 다하여 죽고 말았다. 그는 그늘에서 그림자를 쉬게 하고 조용히 멈추어 발자국을 쉬게 할 줄 몰랐으니 어리석음이 또한 심하다."

다분히 노장철학이 짙게 풍기는 글이다. 글의 요지는'그늘에서 그림자를 쉬게 하고(處陰以休影), 고요함에서 자취를 멈추게 한다.(處靜以息迹)'는 것이다. 여기서 그림자와 자취(발자국)는 같은 의미의 중의어(重意語)라고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형체에 연연해하며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자취를 남긴다. 때로는 그 자취로 인하여 괴로움과 곤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자취를 지워버리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햇빛을 피하여 그늘로 들어가면 그림자가 없어지듯, 번잡한 현실을 벗어나 임천(林天)에 들어가 은거하면 자연히 그 자취도 사라진다. 그림자를 쉬게 한다는 식영(息影)이란 정자 이름에는 이렇듯 도가적 은둔의 정서가 스며 있다.

이런 멋진 정자 이름을 지은 이는 중종과 명종 대의 문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이다. 정자는 그의 사위 김성원(1525∼1597)이 만들어 장인에게 드렸다. 담양부사를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난 장인의 노후 쉼터로 사위가 정자를 지어준 것이다. 임억령과 김성원은 장인과 사위 이전에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임억령은 시문으로 당대에 명성을 얻었으나 관직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아 담양부사 직을 마친 후 담양 성산에 은거하여 식영정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식영정은 1560년(명종 15년)에 건립하였고 정자 이름은 3년 뒤인 1563년에 지었다. 이때 임억령이 고향 해남으로 돌아가면서'식영'이란 정자 이름을 지은 것이니 아이러니하게도 임억령이 있을 때는 정자 이름이 식영정이 아니었던 셈이다. 비록 3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임억령은 그늘에 들면 그림자는 자연히 사라진다는 장자의 식영론(息影論)을 자득하고 성산의 자연 그늘을 찾아 선옹(仙翁)이 되어 시선(詩仙)의 삶을 즐긴 것이다. 녹음이 우거진 풍광 좋은 식영정 마루에 앉아 400년 전 인물 석천 임억령을 생각하면서 몸과 마음을 쉬니 신선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식영정을 중심으로 시문을 교류하며 자연 속의 삶을 찬미한 식영정 사선(四仙)은 임억령과 그의 제자들인 김성원, 고경명, 정철이다. 지금은 광주호로 인해 주위 환경이 달라져 옛 모습을 유추하기 쉽지 않으나 당시 식영정의 풍광은 임억령과 이들 사선이 지은 <식영정 20영>에 잘 나타나 있다. 현재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단아한 팔작지붕 기와집이나 16세기 건립 당시에는 띠 풀로 지붕을 덮고 대나무로 처마를 두른 소박한 모옥(茅屋) 형태였다.

식영정 아래로 흐르는 개울을 자미탄(紫薇灘)이라고 하는데, 자미(紫薇)는 백일홍 또는 배롱나무의 별칭으로 자미탄이란 배롱나무가 양쪽으로 줄지어 피어있는 개울가라는 뜻이다. 돌계단을 비스듬히 올라가 정자로 향하면, 오른편에 누마루 다리를 연못에 내딛고 있는 부용당(芙蓉堂)이 단아하게 서 있고, 그 옆에는 서하당(棲霞堂)이 자리 잡고 있다.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 식영정 마당에 들어서서 오른쪽 옆으로 돌아가면 400여 년 수령을 자랑하는 소나무가 문인석처럼 위엄있게 서 있다. 그리고 노송 왼쪽 뒤에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시비가 있다. 식영정은 송강의 가사 문학 <성산별곡>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김종수 건국대학교 대학원 세계유산학과 겸임교수·문학박사

하지를 지났으니 햇볕은 더 뜨겁게 대지를 달굴 것이다. 인생 60을 지났으니 이제는 나의 그림자를 쉬게 하고 자취를 멈추게 할 때가 온 것 같다. 명예와 공리를 내려놓는 것,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아 사는 것이 진정한 나의 식영(息影)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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