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권오중 시인·가수

디아스포라(Diaspora)는 그리스어 dia(너머)와 spero(씨를 뿌리다) 합성어다.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을 말한다. 대표적인 집단이 유대인이다.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유명해지기 전에는 그리스인 디아스포라가 대표적인 디아스포라였다

한민족 역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말 사이에 상당한 규모의 디아스포라가 있었다. 조선 말기의 혼란을 피해 1860년대부터 많은 수의 사람들이 연해주와 만주 일대로 이주하였다. 이후에는 단순히 경제적인 동기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동기를 가지고 해외로 이주하는 수가 늘어났다.

1930년대 이후로는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 해외 침공 등에 동원되어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서, 1945년 광복 당시 공식적인 통계로 일본에 약 110만 명, 만주 일대에 120만 명이 이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방 후 미국 등으로 나간 한국인 디아스포라 후예들도 있다.

러시아 연해주, 외만주로 이주했던 한인들은 소련의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하여 고려인으로 머무르게 되었다. 사할린에도 한인이 남아있다. 또한 만주에 이주한 사람들은 광복 이후에도 절반 이상이 현지에 머무른다. 귀국 대신 남아있는 것을 선택한 조선족들이 있다.

한인 디아스포라 문학의 선구자인 포석 조명희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운동 참가로 투옥되었다 출옥하였다. 1921년 7월에 근대 문학 최초의 희곡 창작집인 「김영일의 사」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일본과 조선에서 쓴 시를 모아 1924년 6월에 국내 최초 창작시집 '봄 잔듸밧 위에'를 간행했다. 1928년 4월에 '낙동강' 소설집을 발간하였고, 10월에 소비에트연방으로 망명한 후 첫 산문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했다.

또한 조명희는 소련에서 '아동 문예를 낳자'(1935), '조선의 놀애들을 개혁하자'(1935) 등의 평론을 발표했다. 1936년 소련작가동맹 원동지부에서 간사로 활동하며 '노력자의 조국' 주필로 고려문학 건설에 힘썼다. 1937년 9월에 KGB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1938년 5월11일 일본 간첩죄 누명으로 총살형을 당했다. 1956년 7월20일 극동군 관구군법회에서 1938년 4월15일 결정을 파기, 무혐의 처리 후 복권되었다.

1959년 러시아 조명희 문학유산위원회 주관으로 조명희 선집 발간되었다. 1988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알리세르 나보이 문학박물관'에 조명희 기념실 설치되었다. 1992년 타슈켄트 남쪽에 '조명희 거리'가 명명, 2년 뒤 1994년부터 포석 조명희 탄생 100주년을 기념 '제1회 포석 조명희 문학제'가 개최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한 2001년 중국 연변에서는 포석회가 창립되어 이듬해부터 매년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시인, 소설가, 희곡인, 아동문학가, 평론가, 교육자, 언론인, 번역가 등 다양한 부문에서 근·현대문학사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포석 선생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스리스크, 하바로프스크 등 연해주 지역의 고려인들은 '항일투쟁영웅 59인'의 한 사람으로 기리고 있다.

국내에서는 2003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 문학비가 건립되었고 포석 문학 공원이 조성되었다. 매년 포석 조명희 문학제와 전국 시낭송 경연 대회가 동양일보 주최로 개최되고 있다. 따라서 타슈켄트, 연변, 진천까지 문학제가 개최되는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조명희 선생은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했던 항일문학가로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3.1절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권오중 시인·가수
권오중 시인·가수

디아스포라 조명희는 절절한 그리움을 시로 읊었다. 나의 고향이 저기 저 흰 구름 너머이면/새의 나래 빌려 가련마는/누른 땅 위에 무거운 다리 움직이며/창공을 바라보아 휘파람 불다//나의 고향이 저기 저 높은 산 너머이면/길고 긴 꿈길을 좇아가련마는/생의 엉킨 줄 얽매여/발 구르며 부르짖다(나의 고향이 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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