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이명훈 소설가

집을 비울 때가 있다. 한 달에서 석 달 정도 타지에 머물며 글을 쓴다. 오늘 짐을 꾸리다보니 이런 생각이 스쳤다.

또 떠나야 한다. 나는 유목민도 아니고 정주민도 아니다. 떠돌이별도 아니고 별도 아니다. 나뿐 아니라 뭇 존재는 은유나 상징에 완전히 포섭되지 않는다. 언제나 포섭의 망을 찢고 나온다. 바깥은 안을 에두르며 바깥과 안은 서로 통한다. 사람은 안과 바깥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그런 꿈을 꾸는 존재이다. 장자 풍의 이야기나 노자의 바람 같은 노래가 고대로부터 흘러왔어도 인간은 그 무상의 언덕을 스치며 또 흐르는 여울, 강, 바다, 구름, 비…그런 물상이나 은유, 상징을 또 벗어난다. 규정할 수 없기에 존재라는 말에도 담아보지만 그러자마자 넘친다. 실존에 담아본 시절도 있었다. 실존주의가 풍미하던 시절이었다. 인간 존재는 실존에도 충분히 담을 수 없기에 실존 이후에 구조, 탈구조 등에도 이른다. 서양 철학사의 긴 강물들을 다 동원해도 인간 존재는 충분히 해석되지 않는다.

지구촌의 이편에선 무극이니 무(無), 율려, 삼십삼천, 도통이니 우주의 질곡과 리듬, 리와 기, 성과 공, 허 등 청허하고 심오한 것들을 거치지만 또 남는다. 거대한 대지, 광활하고 현묘한 천지를 통과하고도 남는 잉여가 늘 존재한다. 이쯤 되면 인간이 만들고 빚고 형상화해온 것들, 정신적, 문학적, 철학적, 예술적 장치들 곧 은유, 상징, 개념이 새로운 빛으로 드러난다. 그것들은 늘 새롭게 변주되면서도 인간 존재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기에 밀려난다. 새로운 것들이 또 나타나도 일정 시간 훌륭한 역할을 하다가 비슷한 패턴을 반복하다가 밀려난다. 인간은 이렇게 스스로 만들어온 것들과 부단히 얽히며 새로운 가능성도 생기며 속박되다가 벗어나고 또다른 새로운 것들과 마주친다. 미래, 과거, 현재라는 그럴싸하면서도 미지의 신비 속을 서로 함께 흔들리며 통과하면서도 여전히 미진한 무엇과 늘 마주한다.

이러한 면이 인간 존재의 본질에 속할 것이다. 물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무수한 이론과 사유, 이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찾아내고 만든 모든 것들의 총합, 자연과 우주에서 드리워주는 것들의 겸허한 수용과 빛나는 가공 속에서 그 어떤 것들로 인간을 해석하더라도 인간은 충분히 해석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 어떤 포섭이라도 그 망을 뚫고 나아가는, 본질적으로 포섭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은 당연한듯 하면서도 놀라움을 준다.

사회나 역사, 문명들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완벽해보일지라도 이러한 인간 존재의 본질 앞에선 상대적인 것일뿐이다.

사회나 역사,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의 무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생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위해 보다 나은 사회, 역사. 문명의 창출을 위한 창조적이며 해체적, 희망을 담은 비판 말이다. 교육, 정치, 언론, 사회 문화 등 세부적인 영역들에 대한 비판의 지점도 마찬가지이다.

이명훈 소설가
이명훈 소설가

어떤 답답함이 이 글을 쓰도록 나를 추동했을 것이다. 추상적이고 막연한 표현에 머무르는 성격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너무도 중요한데 정작 그것에 대한 사유, 질문, 대화가 실종되어버린 듯한 현실이어서 그러면 안되는 거 아닌가 하는 통렬한 마음과 공분심에서 우러나온 글일 것이다. 떠나기 위해 짐을 싸는 행위는 경계에서의 일이다. 머뭄과 떠남, 정주와 유목, 이쪽과 저쪽, 이상적인 현실과 당면한 현실, 바람직한 것과 부조리한 것 사이의 경계 역시 이 글의 집필 동기가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