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조성 원광대학교 소방행정학과 교수

올해 여름 오송 궁평지하차도에서 17명의 귀중한 생명이 희생된 일이 있었다. 그날의 참상과 분노의 기억은 어느덧 4개월에 접어들며 뉴스의 보도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시민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사건 당시 여러 기관의 책임소재를 묻고, 대안을 마련하고 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채 여론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점점 멀어져 가는 듯 하다.

대형 참사가 있고 나면, 피해자와 유가족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알려지고 시민들이 같이 슬퍼하고 관심을 갖는 시기를 거치고 나면 많은 이들은 사건 자체만 기억할 뿐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하지 못한다. 사망자로 기억된 한명 한명은 누군가의 아들 딸이며, 배우자이고, 아버지 어머니였을 것이니 그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가슴에 안게 된 남은 사람들은 죽음의 숫자에 4배, 5배를 넘고야 말 것이다. 살아남은 피해자와 떠나보낸 유가족에게 치유와 회복은 쉽지만은 않다. 누군가는 가장을 잃고 누군가는 자식을 잃고, 어린 아이는 부모를 잃었으니 어느날 갑자기 삶은 신이 훼방을 놓은 듯 달라지게 될 것임을 무엇으로 치환할 수 있는것인가.

과거의 재난관리가 신속한 복구와 재난 이전 상태로 되돌려 놓기에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는 더 나은 재건, 즉 회복에 초점을 맞추는 장기적인 복구로 그 초점이 옮겨가고 있다. 장기적인 문제해결이란 지역사회 안에서 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일로 확장되는 것이다. 피해자에 대한 지원의 범위를 확대하고, 심리적으로 회복하는 기간과 애도의 시간을 충분히 갖고자 하는 것도 같은 의미가 있다.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고 혹은 유가족의 슬픔을 공감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기리는 일 뿐만아니라 사고가 일어난 '우리'라는 공동체에게도 치유와 회복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회복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데 대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도의 그리고 미안함 또는 그런일을 반복해서 희생자를 또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책임감에서 온다. 책임의 주체는 비단 소관 담당 공무원 만이 아니다. 시민 한사람 한사람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이런일이 벌어질 수 있고, 내가 희생될 수 있고, 나와 가족이 아픔을 겪을 수 있었다는데 대한 또다시 반복되서는 안된다는데 대한 문제의식이어야 한다. 참사는 언제나 슬픔 이상의 우리에게 의미를 주고 시사를 준다. 슬픔 속에서 그 시사를 찾아 내야 만 하는 것이다.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한 이후, 맨하탄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있던 그 자리는 그대로 그라운드제로 추모하는 메모리얼 파크가 되었다. 메모리얼 파크에는 커다란 사각 조형물 속으로 물이 사방에서 흘러내리는 두 개의 인공폭포다. 공간의 이름은 '부재의 반추'. 3천여명의 희생자들이 떠나간 자리, 그 빈 자리를 돌아본다는 의미이다. 사각의 폭포 난간에는 희생자의 이름이 빠짐없이 적혀있다. 희생자의 이름은 친한 친구, 직장동료, 생의 마지막을 함께 한 사람들 끼리 함께 놓였다. 개인들의 기념일이 되면 이름이 적힌 그 자리에 꽃이 놓이기도 한다. 세계 무역센터의 테러와 이후 붕괴로 인한 희생자와 구조 및 복구 작업자를 위한 기념관이 계획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과연 그 자리에 세워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건물 가치만 1조 4천억이라는 건물이 무너졌고, 그 토지의 환가는 헤아릴 수 없이 비싼 땅이다. 세계 경제의 심장부, 수많은 사람들과 관광객이 오가는 곳, 미국의 상징과 같은 의미를 가진 곳이기 때문에 다시 재건한다는 의미에서라도 과거의 무역센터 보다 더 거대하고 웅장한 건물을 세워 미국의 건재함을 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념관의 설계는 그렇지 않았다. 그 높던 건물 자리에는 하염없이 물이 매일 쏟아지지만 채워지지 않는 그라운드 제로가 놓였다. 누군가를 떠나보낸 슬픔이라는 것은 이렇게 매일 쏟아지지만 결코 그 그라운드를 채우지 못한다는것과 같다. 이 공간은 모든이들이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한 마음으로 난간에 새겨진 비석과 같은 이름에 눈길을 주고, 쏟아져 내리는 폭소 사이로 이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면 그 역할을 다한 것이라 여긴다. '삶과 죽음의 공간', 죽은이를 기리는 공간이며 동시에 부단히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무심한 듯, 호기심인 듯, 물길을 흘려보내는 교차의 시간이 존재하는 곳이다.

우리가 오송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와 방식은 여러 가지일 것이다. 지금껏 우리의 복구방식이 생명앞에 너무나 천박하고 죽음앞에 무례하다. 삼풍백화점 위령탑은 도산공원 어딘가에 보이지 않게 가려져 있고, 그 자리는 거대한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섰다. 오송 참사의 희생자들은 합동 분향소 마저도 이리저리 떠돌았다. 돈으로 피해를 지원하고 그렇게 돈을 지불하면 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가족을 잃어 슬퍼하는 사람들은 돈을 받기 위해서라는 비난을 참아내야 한다. 흔히 떠드는 말로 나라를 구하다 죽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어느날 갑자기 길거리에서 자신의 일생을 종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삶은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돈 말고 기꺼이 충분히 슬퍼해 주었으면 좋겠다.

조성 원광대학교 소방행정학과 교수  
조성 원광대학교 소방행정학과 교수  

누군가는 잘못이 있고,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애도하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오답노트를 만드는 이유는 비슷한 문제가 나오면 절대 틀리지 않기 위해서다. 시험이 끝난 뒤 오답노트를 적을 공간이 필요하다. 벌써 몇 달 지나지 않았음에도 오래된 이야기처럼 사람들은 금방 잊는다. 쉽게 잊는 만큼 지난날의 잘못을 반복할 가능성은 커진다. 우리에게는 잊지 않을, 기억을 담아 둘, 우리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멈춰진 기억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 여름 오송에서의 아픈 기억이 일회적으로 휘발되지 않도록 기억의 공간을 가질만한 시민의 교양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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