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정 / 청주사회복지協 사무처장

장유유서(長幼有序)가 물구나무 서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이 어느 사인가 천진난폭해지는 시대적 폭풍 속에서도 변하지 못하는 우리네 대화 엇박자 분위기는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남녀가 유별하다지만 지구상 종(specirs)의 생존을 위해 위계가 아닌 유기적 관계를 맺어야하는 인간임에 불구하다. 땅덩어리가 좁아터져 서울에서 '지화자'하면 부산에서 '좋∼다'고 응수 할 만큼 부대끼고 살아가면서도 여전히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상대방을 낯설어 한다.

남편과 대화의 물고를 튼다고 시작한 한 여성의 말 걸기다. "내일 죽어도 좋으니 돈벼락에 한번만 맞었음 소원이 없겠어! 옆집아저씨는 어쩌구한데 당신은 왜 저쩌구 하는가. 뭐니뭐니 해도 돈 많은 남자가 제일 좋더라"라며 답답한 마음을 여과 없이 하소연 해보지만 그건 상대방에 대한 비수가 되어 마음에 상채기를 내고 돌아앉게 할 뿐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화답이 좋을리 없고 화끈하게 한마디로 분위기를 종료시킨다. "난 말없는 여자가 좋아."

이 대화만으로도 그들의 대화통로가 얼마나 꽉 막혀 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한쪽은 본인의 입장을 솔직하게 터놓고 있지만 일방적이고, 한쪽은 상대방의 입장을 모르는바 아니나 입 다물고 있어 달라고 할뿐이다. 오래못가 한쪽의 잔소리 같은 대화의 노력도 분명 포기되고 말 것이다. 대화는 없고 지붕만 함께 덮고 사는 남남 같은 부부가 될 것이다.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각기 다른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니 잘잘못을 따지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녀와 나무꾼에서 선녀가 아이를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로 가고야 마는 모성의 모질음을 가지고 어떤 이는 못된 어미라고 혀를 차기도 한다.

그러나 잘 따져보자. 선녀는 계획에도 없던 옷을 뺏기면서 촌구석 아줌마가 되었으니 복장이 터질 입장이고, 나무꾼은 이쁜 선녀에 눈이 멀어 남의 인생을 자기 것으로 만든 사기꾼은 아니었을까.

그러한 관계로는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선녀가 본인의 집으로 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차이를 조정해주는 역할로 대가족 안에 자식이 있었고 부모가 있었고 가족 같은 이웃도 있었다. 지금은 핵가족화로 그것을 기대할만한 가족도 없다. 돈을 주고라도 상담소를 찾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서로가 자신의 입장만 고수하다가 끝내는 각자의 길을 각각 가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이해를 위한 노력은 없고 끝없는 침묵과 주장으로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 부부란 반드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관계가 아니다. 다만 서로가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같은 언어로 덮어주고 이해해주는 거울 같은 이웃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콩깍지에 눈이 멀고 귀에서는 종소리가 들린다더니 그놈의 종소리 때문에 인생 종쳤다는 아줌마들의 회한곡은 남편들도 마찬가지란다.

가족의 복지는 경제적 회복만으로 이뤄질 수 없다. 돈 많은 사람들이 매사 행복한 부부가 되지 않는 것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가족이란 가장 슬픈 일을 겪을 때 가슴으로 울어주고, 기쁜 일이 있을 때 가장 기뻐해주는 혈연과 법으로 맺어준 이웃인 것이다. 세상엔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다. 5분전 내가 했던 행동과 생각을 스스로도 이해 못하는데 가족이기 때문에 나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는 서로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어쩐지 안타까운 심정이 들고 상대방이 초라해 보이고 더 챙겨주고 싶어지는 그런 부부 말이다. 그때 비로서 가족의 언어로 사소한 것들에서 자유로와 지고 말없이 대화를 하게 된다고 한다. '대화'가 가족의 복지증진과 삶의 질을 향상시켜 줄 키워드다. 나이 들어 상대방이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려면 최소한 다른 언어로 격렬하게 싸우기도, 서로 다른 입장을 완강하게 고수할 수도 있는 적지 않은 세월을 함께 넘어서야 한다. 가족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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