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방서 주전부리 먹고 썰매 타고… 대가족 행복 보금자리

홍이 씨는 덕수마을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덕수마을은 청주시 옥산면에서 제일 오지마을로 천안시 병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옥산장보다 병천장이 더 가까워서 마을 사람들은 주로 병천장을 이용했다. 마을 뒷산에는 도장골이 있고 깊은 골짜기 안에는 병풍바위, 불알바위가 있으며 샛말, 아랫말, 웃말, 부엉골 등 정겨운 이름들이 남아있다.

지금이야 길이 좋아서 금방 갈 수 있지만 1970년대만 하더라도 사정이 다르다. 해가 짧은 겨울날 면사무소 공무원들이 덕수마을에 출장 가면 자칫 하룻밤을 자고 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한다. 1970년에 마을 옆으로 경부고속도로가 생겼다. 주민들이 서울로 출타할 때 고속도로 위에 올라가서 가마니나 헝겊에 '서울 갑니다'라고 써서 들고 있으면 가던 차들이 태워줬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대중교통인 시내버스는 1980년대 초에나 들어왔다.
 

홍이 씨 남편 진태 씨는 어찌어찌하다 처갓집 동네에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두 사람은 처녀총각 시절에 농촌 4H클럽에서 함께 활동했다. "사실 눈이 맞은 건 아닌데 눈이 맞았다고 소문이 나서, 그 소문이 진짜처럼 되어서 결국 결혼했어요." 홍이 씨의 친절한 설명에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진태 씨는 지금 덕수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데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올해 71세가 되었건만 적당한 이장 후임이 나타나지 않아 본의 아니게 장기집권하고 있는 형편이다. 내년에 은퇴 예정인 주민이 있어 그가 퇴직하는 대로 이장직을 물려주려 했는데 정년이 5년이나 연장되었다면서 극구 사양하고 있다. 난감해진 진태 씨다. 최근 몇 년 동안 노인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면서 인구가 자꾸만 줄어든다. 현재 마을 인구는 25가구에 48명이다. 그중 홍이 씨 집은 그녀 부부와 아들, 며느리, 손녀딸 둘, 합 여섯 명으로 덕수마을 인구의 10%를 넘게 차지하고 있다.

마을 앞 냇물을 막아 농경지를 이룬 덕수(德水)마을은 물의 덕을 보고 산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진주정씨(晉州鄭氏)와 중화양씨(中和楊氏)가 많이 살았다. 경부고속도로가 덕수마을을 지나면서 마을이 좁아졌다. 그 도로가 다시 확장되고 휴게소가 생기면서 마을은 더 좁아지고, 그때마다 주민들은 보상금을 받아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졌다. 주민들은 이때부터 청주로 진출해 두둑한 주머니를 풀기도 했다고 한다.

홍이 씨는 중화양씨 후손이며 결혼 후 잠시 남편과 함께 객지 생활하다 덕수마을에 정착한 지 25년 되었다. 특유의 부지런함으로 밭을 일구고 동네 어르신들을 부모처럼 섬기며 덕수마을 살림을 도맡다시피 하고 있다. 한우 몇 마리, 비닐하우스 몇 동과 작은 텃밭은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녀에겐 일터이자 놀이터이기도 하다.
 

홍이 씨는 오방색을 좋아해 음식을 차릴 때도 예쁜 색깔을 내려고 애쓴다. 그녀의 사랑방인 황토방에 들어가니 조붓한 탁자 위에 주황색 감말랭이, 초록 키위, 호두, 아몬드가 담긴 접시가 있다. 그 옆에 하얀 찹쌀풀이 곱게 부풀어있는 부각이 돋보인다. 부각 재료는 뽕잎, 생강나무잎, 가죽나무순 등이다. 이른 봄부터 연한 잎을 따서 잘 찐 다음 찹쌀풀을 얇게 발라 햇볕에 말려두었다 튀기는 것이다. 가죽나무순의 쌉싸름한 맛과 찹쌀의 고소함 이 눈 부신 햇살 맛이다. 햇볕을 좋아하는 홍이 씨는 봄부터 가을까지 그 햇볕이 아까워 무엇이든 말려둔다. 시골살이의 고단함과 가끔 축축하게 젖은 마음도 이 햇살에 말렸으리라.
 

샛말에 마실 가니 나무 베는 소리가 들린다. 홍이 씨 동네 후배가 사는 집 마당에서 건장한 두 형제가 통나무를 자르고 있다. 겨우내 사용할 땔감을 준비하는 모양이다. 잠깐 쉬는 틈에 홍이 씨는 그들과 도란도란 옛이야기 나눈다. 어린 시절 덕수마을에서 함께 자란 사람들이다. 소중한 인연이다.

동지섣달엔 고마운 사람들이 유난히 생각난다. 인생길에서 바둥바둥할 때 말없이 살짝 밀어준 사람, 따듯한 말로 토닥여준 분들이 더없이 감사하다. 겨울 햇살에 반짝이는 그녀의 얼굴에서 인생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아름다운 황혼이다.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어릴 때는 겨울에 뒷산에서 부엉이가 많이 울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소리가 사라졌어요. 겨울이 오면 부엉이 소리가 그리워지네요." 두 손녀를 위해 만든 조그만 썰매장을 바라보며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덕수마을에 하얀 눈이 내리고 홍이 씨의 겨울은 깊어만 간다. / 김애중 청주시 기록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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