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보다 사냥을 더 즐긴 타고난 자유인… 기첩 '어리사건'으로 폐위

현재의 청주시 전경으로, 조선시대 청주읍성은 사각형 안에 위치했다. 양녕대군은 이 읍성안 어느 초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드론 촬영.
현재의 청주시 전경으로, 조선시대 청주읍성은 사각형 안에 위치했다. 양녕대군은 이 읍성안 어느 초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드론 촬영.

조선시대 세자는 달리 ‘저군’(儲君)이라고 불렀다. 이때의 ‘儲’는 ‘예비하다’라는 뜻이다. 저군은 ‘예비 군주’라는 뜻이 된다. 조선시대 세자는 종법에 따라 맏아들 계승이 원칙이었다. 그 중요성 때문에 세자로 책봉되면 ‘시강원’이라는 세자 전문교육기관에서 엄격한 예비국왕 수업을 받았다.

 조선시대 세자의 지위에 오른 인물은 모두 30명이다. 이중 18명만 보위를 승계했다. 나머지는 임금 자리에 오르기 전에 사망하거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부왕(父王)으로부터 폐위됐다.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은 후자에 속한다.

 일설에는 양녕대군이 동생 충녕대군(1418~1450, 후에 세종대왕)의 성군된 자질을 미리 알아보고 일부러 미치광이 짓을 했다는 설이 있으나 야사 단계에 머물러 있다. 부왕 태종과 세자 양녕은 성격부터 크게 달랐다. 태종은 치밀하면서 엄격한 데 비해, 양녕은 난봉 기질에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다.

◆부왕에게 빠득빠득 대들기 시작하다

 양녕은 글보다는 사냥을 더 즐겼다. 태종은 양녕이 글 읽기를 게을리하자 그가 보는 앞에서 세자궁 내시의 종아리를 때렸고 볼기를 때리도록 시켰다. ‘임금이, 세자가 공부를 게을리 하므로, 노희봉(盧希鳳)을 시켜 좌우에서 시중드는 자인 노분(盧犇)에게 볼기를 때리니, 분이 세자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소인(小人)의 죄입니까?” 하니, 세자가 기뻐하지 아니하였다.’-<『태종실록』 5년 10월 21일>

태종 13년 3월 양녕은 평양기생 소앵(小鸎, ☞)을 궁궐로 불러들였다가 적발됐고, 태종의 분노는 폭발했다. 양녕은 단식으로 저항했고, 이때를 기점으로 태종에게 빠득빠득 대들기 시작했다. 

세자의 의무인 ‘서연’(書筵, ☞)에도 갖은 핑계를 대며 툭하면 빠졌다. 서원관으로부터 “편치 못하다면서 강의를 정지하고 과녁을 쏘는 것은 가합니까?”(『태종실록』 17년 3월 23일)라는 면박을 받을 정도였다. 

 태종의 난봉 기질도 만만치 않아 19명의 후궁을 뒀다. 이것은 왕비 원경왕후와의 잦은 부부싸움, 그리고 민무구 등 4명의 처남을 사사하는 꼬투리로 작용했다. 약(?)이 오른 양녕은 드디어 부왕의 약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전하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宮中)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가이(加伊)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가 어려울 것을 불쌍히 여기고, 또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하게 하면 성예(聲譽, ☞)가 아름답지 못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태종실록』 18년 5월 30일> 

  

◆태종, 비 오듯 눈물을 흘리며…

 전 중추부사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와 사통하고 급기야 혼외자까지 낳으면서 당시 조정의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다, 태종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면서 양녕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세자의 행동이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어찌하겠는가? 어찌하겠는가? 태조께서 관인(寬仁)한 큰 그릇으로서 개국(開國)한 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그 손자에 이르러 이미 이와 같은 자가 있으니, 장차 어찌하겠는가?” 하고, 인하여 비 오듯이 줄줄 눈물을 흘리고,(하략)’-<『태종실록』 18년 3월 6일>

 태종 18년(1418) 태종은 15년간 세자로 있던 적장자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교체하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그럼에도 양녕 주변에는 반전이 일어나지 않았다. 애첩 ‘어리’가 주위의 손가락질과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 자살을 했고, 양녕은 다른 집의 좋은 개(犬)를 몰래 가져오다 들통나기도 했다.

◆청주성은 견고하고 한양서 가깝다

 대신들이 양녕의 유배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그 장소는 전국 8도의 여러 고을 중에 ‘청주’를 처음부터 지목했다. 그 이유는 △청주성이 견고하고 △관사가 넓으며 △한양으로부터 가까운 거리 등이 배경이 됐다.

해동지도 (1750년대 초반)의 청주읍성 모습.
해동지도 (1750년대 초반)의 청주읍성 모습.

 ‘좌의정 이원(李原)이 계하기를, “근일에 양녕의 방금(防禁)을 소홀히 하므로 인하여, 무지하여 죄를 범한 사람이 많으니, 진실로 민망할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충청도의 청주는 성(城)이 견고하고 관사가 넓으니, 만약 양녕을 이곳에 옮겨둔다면 방금이 편이하고, 외부 사람이 사사로이 내왕하는 폐단이 없어질 것이니, 양녕을 보전하는 계책은 잘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하략)’-<『세종실록』 5년 2월 26일>

 세종 5년 3월 세종대왕은 ‘청주(淸州) 관사(館舍)를 수즙(修葺, ☞)하여, 자녀(子女)와 처첩(妻妾)과 노비(奴婢)를 그전대로 모여 있게 하고, 늠봉(廩俸, ☞)을 넉넉히 주어서’라는 조건으로 친형 양녕대군의 청주읍성내 유배를 결정했다. 

 그 이후부터는 ‘동생과 형의 우애’ 시간이었다. 세종은 양녕대군의 이삿짐을 옮기는데 관청의 말을 사용토록 했고, 청주 유배지의 문을 지키지 말 것이며, 대신 노비들은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허용했다.

 형에 대한 동생의 애틋한 마음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청주읍성 유배지에 사기기릇을 보내도록 했고, 담장을 너무 높이지 않도록 했으며, 각종 약(藥)과 술, 술쌀을 청주 유배지에 보내도록 했다. 심지어 우유를 만들어 양녕에게 주도록 했다. 

세종실록 5년 3월 11일. '청주 관사를 수즙하여 처첩과 노비가 과거처럼 의지하게 하여'라는 표현이 보인다.
세종실록 5년 3월 11일. '청주 관사를 수즙하여 처첩과 노비가 과거처럼 의지하게 하여'라는 표현이 보인다.

 ‘충청도 감사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청주(淸州)에 있는 국고(國庫)의 묵은 쌀과 콩으로 젖 짜는 소를 사서 날마다 우유를 받아 양녕 대군에게 먹이도록 하라.” 하였다.’-<『세종실록』 5년 4월 4일>

 

◆대사헌 하연의 반대가 가장 심하다

세종은 유배 1년이 다가오면서 양녕의 해배(解配)를 넌즈시 거론하기 시작했으나 유배지 인식은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세종은 1년전 청주 유배처를 ‘관사를 수즙하여, 자녀와 처첩과 노비를 그전대로 모여 있게 하는 곳’이라고 했으나 어느덧 ‘두어 간’으로 좁아져 있었다. 대신들에게 양녕 거처의 누추함을 과장하기 위한 언사였다. 

 ‘“내가 지난번에 사람을 시켜 청주(淸州)에 있는 양녕(讓寧)의 안부를 물었더니, ‘양녕이 초가(草家) 두어 간을 짓고서 그 집에 거처하면서 마음 편히 지내고 있다.’고 하고(중략) 귀양간 처소가 좁고 누추함이 비할 데 없다 하니, 한갓 생각하는 마음만 더욱 간절하니, 나는 그를 이천(利川)으로 다시 돌아와 있도록 하려고 한 지가 이미 오래였으나, 감히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가 없어서 경들의 말을 듣고자 하노라.” 하니,(하략)‘-<『세종실록』 6년 2월 6일> 

 세종 6년 2월 세종대왕은 양녕의 청주읍성 해배를 결정하고 본래 살던 경기도 이천으로 짐을 옮기는데 역마 14필을 지원했다. 대신들이 “해배는 안 된다”며 집단으로 손사래를 저었고, 특히 오늘날 검찰총장격인 당시 대사헌 하연(河演, 1376~1453)의 반대가 심했다. 

당시 대사헌 하연은 양녕대군의 청주읍성 해배를 가장 심하게 반대했다. 그의 영정을 모신 문효영당이 청주시 현도면 우록리 67-3에 위치한다. 드론 촬영
당시 대사헌 하연은 양녕대군의 청주읍성 해배를 가장 심하게 반대했다. 그의 영정을 모신 문효영당이 청주시 현도면 우록리 67-3에 위치한다. 드론 촬영

 “신자(臣子)의 죄는 불충과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으므로, 왕법(王法)에 있어 사(赦)할 수 없습니다. 제(禔, ☞)가 불충 불효한 죄를 지고 지위가 2품 이상의 자리에 있게 되어, 대간이 여러 번 상소하여 청함에 이르렀으나, 전하께서는 우애하시는 정으로 법대로 처하지 아니하고 다만 청주(淸州)에다 옮겨 두어(하략)”-<『세종실록』 6년 2월 14일>

 하연은 “벼슬을 그만 두겠다”는 말까지 하며 해배 반대에 결사적이었다. 세종은 대신들의 빗발치는 반대 여론에 이른바 ’역질 유행론‘으로 맞섰다. 왕권과 신권이 ‘상황론’대 ‘원칙론’으로 부딪치는 형국이 됐다. 

 “양녕을 돌아오도록 하지 말라는 청이 이치에 당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내가 그를 먼 지방 누지에 구수(拘囚)된 것을 차마 볼 수가 없는 것이고, 또 금년에 역질이 크게 유행되니 만일 불행히도 이에 걸린다면, 나아와 그 책임을 지더라도 그 후회가 일을 돌이킬수 있겠는가?”-<세종실록 6년 2월 15일>

 

(표) 양녕대군의 청주읍성 유배 전후
(표) 양녕대군의 청주읍성 유배 전후


◆자유인 양녕, 세종보다 12년을 더 살다

세종 6년 2월 양녕대군은 본래 살던 이천집으로 돌아갔고, 세종은 그런 형에게 “고생했다”며 약주 10병과 꿀 한 그릇, 그리고 여가에 사용하라며 궁시(弓矢)를 내려주었다. 이상에서 보듯

태종은 종법이 규정한 맏아들보다 ‘현명한 세종’을 최종적으로 선택했고, 세종은 형 양녕에 대해 국가의 논리보다 ‘家의 논리’, 즉 형제애로 대신들의 공격을 막았다.

자유인이 된 양녕대군은 이후 전국을 유람하며 아이러니하게도 세종보다 12년을 더 살았다. 

 세조 3년 10월 양녕대군은 보은 속리산 일대를 유람하다 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속리산문영월흉보’(俗理山聞寧越凶報)라는 한시를 지었다. ‘임금이시어 어디로 가셨나이까(龍御歸何處) / 근심어린 구름이 영월에 일어나고(愁雲起越中) / 온 산천이 텅 빈 듯 쓸쓸한 가을밤(空山十月夜) / 통곡하며 하늘에 호소합니다(痛哭訴蒼穹)’-<『양녕대군 시조』, 북메이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학교 사학과 박사)
 

☞소앵: 작은 꾀꼬리라는 뜻.

☞서연: 세자와 대신들이 정치와 학문을 토론함.

☞성예: 세상에 떨치는 이름과 칭송받는 명예.

☞수즙: 집을 고치고 지붕을 새로 이음.

☞늠봉: 벼슬아치들에게 주던 봉급.

☞제: 양녕대군 본명인 이제(李禔)를 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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