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륜 정해지면 서열 바꿀 수 없어"… '양자 강등' 거부 제사권 승계

1627년 1월 여진족의 후금이 쳐들어오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정묘호란이다. 9년 뒤인 1636년 12월 압록강이 얼자 여진족이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다시 쳐들어왔다. 병자호란이다.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이번에도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할 것으로 확신했다. 그는 조선의 성을 격파하지 않고 우회하며 고속 질주를 하는, 이른바 '하이패스 전법'을 구사했다.

청나라 군사는 압록강을 넘은 지 6일만에 강화도 길목에 도착, 인조 일행을 기다렸다. 인조는 하는 수 없이 혹한의 눈발을 헤치며 말머리를 남한산성으로 돌려야 했다. 남한산성 농성이 계속되면서 성 안에서는 청과의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主戰派)와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派)가 날카롭게 대립했다.

동양화가 황창배 씨가 후손들의 얼굴을 참고해서 그린 최명길 초상화.
동양화가 황창배 씨가 후손들의 얼굴을 참고해서 그린 최명길 초상화.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 이른바 권도론(權道論)에 입각해 항복문서를 직접 작성하자, 경도론(經道論)을 고집하는 주전파 김상헌(金尙憲)이 이를 면전에서 찢어버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인조는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지만, 청태종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하는 삼전도 치욕을 맛봐야 했다.

최명길에 대한 평가는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권도론이 맞았는가, 경도론이 맞았는가"로 엇갈리고 있다. 최명길은 이와는 별개로 양자(養子), 환향녀, 서얼(☞) 차별 등 당시의 사회적 문제에 대해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 가치로 추구한 '조선의 고독한 양심'이었다.

 

양자에게 관행 깨고 제사권 승계

조선시대에는 아들이 없을 경우 제사를 잇기 위해 양자를 들였다가, 어떤 이유로 친자(親子)가 태어나면 양자를 다시 생가로 돌려보내는 것을 관행으로 여겼다. '파계귀종'(罷繼歸宗)이라고 한다. 파계귀종이 몰인간적이라는 비난을 받자 양자의 파계를 금지하고 '非장자', 즉 '나이 많은 동생'으로 강등하는 관행이 생겨났다. 반대로 장자로 올라서 제사권을 받은 아들은 '나이 적은 형'이 됐다.

최명길은 파계귀종이나 비장자 강등 조치 모두 상식과 인륜에 어긋난다며 반대했고, 이를 행동으로 옮겼다. 양명학 정신인 지행합일의 실천이었다. 최명길의 첫번째 부인은 인동 장씨다. 그는 인동 장씨와의 사이에서 자녀가 없자 아우 최혜길(崔惠吉, 1591~1662)의 차남인 최후량(崔後亮, 1616~1693)을 입양하였다.

그후 최명길은 인동 장씨가 먼저 사망하자 배우자 상을 치른 후 양천 허씨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서 뒤늦게 친자 최후상(崔後尙, 1631~1680)이 태어났다. 최명길은 그때까지의 관습을 거부하고 최후량을 파양하지 않고 변함없이 장자로 여기고 재산도 상속했다.

'인조조에는 또 고 상신 최명길이 후사를 들인 뒤 아들을 낳았으나 호안국(☞)의 고사에 따라 후사(☞)로 들인 아들을 장자로 삼을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천륜이란 일단 정해지면 차서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이야말로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현종개수실록 3년 9월 13일>.

『대전회통』 예전 봉사조 '續'. '續'은 영조 때 개정된 『속대전』을 의미한다. 표시된 부분이 최명길과 관련이 있는 '파계귀종' 내용이다.
『대전회통』 예전 봉사조 '續'. '續'은 영조 때 개정된 『속대전』을 의미한다. 표시된 부분이 최명길과 관련이 있는 '파계귀종' 내용이다.

속대전(영조 22년)은 경국대전(성종 16년) 이후 2백60여년만에 바뀐 조선의 두 번째 헌법이다. 속대전은 최명길의 사례를 아예 헌법으로 명문화, 파계귀종과 비장자 행위를 금지했다.

최명길의 손자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할아버지의 신도비(☞) 글을 같은 소론인 남구만(南九萬, 1629~1711)에게 부탁하면서 '의리'라는 이름으로 할아버지 최명길의 병자호란 행적을 변호하고자 했다. 최석정의 부탁을 받은 남구만은 최명길의 신도비명을 쓰긴 했으나 끝내 '의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랑캐(청나라)에게 무릎 꿇은 최명길의 권도론을 문제 삼은 것이다.

최석정은 남구만의 글을 버리고 같은 소론인 박세당(朴世堂, 1629~1703)에게 신도비명을 다시 부탁했다. 여기에도 파계귀종을 거부한 내용이 등장한다.

후방에서 바라본 품자(品字) 모습의 최명길 묘역. 가운데 봉분이 최명길, 우측은 첫부인 인동장씨, 좌측은 뒤늦게 친자를 낳은 두 번째 부인 양천허씨 묘소이다. 멀리 신도비각이 보인다.
후방에서 바라본 품자(品字) 모습의 최명길 묘역. 가운데 봉분이 최명길, 우측은 첫부인 인동장씨, 좌측은 뒤늦게 친자를 낳은 두 번째 부인 양천허씨 묘소이다. 멀리 신도비각이 보인다.

'조선 사대부들은 이미 후사를 세운 뒤에 아들을 낳으면 소생자(所生子)로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풍속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공은 생각하기를, "부자 관계를 이미 정했고 천륜에 차서가 있으니 바꿀 수 없다"하고 조정에 청하여 후량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이를 법으로 만들게 되었다.'-<최명길 신도비명>
 

목욕하면 정절 회복…'회절강' 설화

1636년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태종 홍타이지는 수 만 명의 인질을 압록강 북쪽으로 잡아갔고, 여기에는 아녀자도 많이 포함돼 있었다. 청나라가 조선 인질을 과도하게 구인한 것은 훗날 포(布) 등 재물과 교환하기 위함이었다.

청나라는 포 60여필을 가져오는 자에 한해 조선으로의 '환향'을 허락하였다. 조선후기 아녀자 한 명이 1년 동안 짤 수 있는 포의 양은 3필 정도로, 60여필은 엄청난 물량이었다.

일부 환향녀들은 친정에서 대가를 지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남편 또는 시댁으로부터 이혼을 강요받았다. 환향녀 이혼 사건을 촉발시킨 인물은 대신 장유(張維, 1587~1638)였다.

'신풍부원군 장유(張維)가 예조에 단자를 올리기를 "외아들 장선징(張善?)이 있는데 강도(江都)의 변에 그의 처가 잡혀 갔다가 속환(贖還)되어 와 지금은 친정 부모집에 가 있다. 그대로 배필로 삼아 함께 선조의 제사를 받들 수 없으니, 이혼하고 새로 장가들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인조실록 16년 3월 11일>

정절을 잃은 여자에게 제사상을 차리게 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환향녀가 '화냥년'이라는 욕말이 된 것은 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최명길은 인륜을 저버린 행동이라며 단호히 반대했다.

'좌의정 최명길이 헌의하기를, "만약 이혼해도 된다는 명이 있게 되면 반드시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허다한 부녀자들을 영원히 이역의 귀신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소원을 이루고 백 집에서 원망을 품는다면 어찌 화기를 상하게 하기에 충분치 않겠습니까.'-<인조실록 16년 3월 11일>.

인조는 최명길의 주장에 동의, 이혼불허 조치를 취했다. 이 대목에서 '각도의 중요 하천에서 몸과 마음을 씻으면 정절이 회복된다'는 회절강(回節江) 구전이 등장하나, 사료에서는 관련 기록이 확인되지는 않는다. 다만 춘원 이광수(李光秀, 1892~1950)의 글인 '나의 고백, 홍제원 목욕'(1962)에 등장한다.

'심양에 잡혀갔다가 돌아오는 여자들은 홍제원(천)에서 모조리 목욕을 하고서 서울에 들어오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들의 정조 문제를 일척(一滌)하기로 하고, 다시 거론하는 자는 엄벌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서 수백의 아내와 딸들이 누명을 벗고, 다시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된 것이다.'-<이광수 전집, 280쪽>

조선이 환향녀의 이혼을 허락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다투던 때 서양에서는 인류 3번째 혁명인 산업혁명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1690년 드니 파팽(Papin, 1647~1712)은 수증기를 이용하여 실린더 내의 피스톤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초기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제임스 와트(1736~1819)가 이것을 상용화할 수 있게 개량하면서 지구상에 근대 자본주의가 출현했다. 이에 비해 성리학에 매몰된 조선의 정파는 환향녀 이혼 문제에 이어 '상복을 며칠간 입을 것인가'를 둘러싸고 예송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강하게 충돌했다.

최명길 묘역의 문인석.
최명길 묘역의 문인석.

최명길은 지면이 부족해 다루지 못하지만 서얼과 서북인 차별데 대한 시정을 강하게 건의했고, 인조가 소현세자비(강빈)에게 사약(賜藥)을 내리는 것에도 반대했다. 조선 양심의 등대가 된 최명길은 우리고장 청주시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253-3에서 영면하고 있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학교 사학과 박사)

'권도론'과 '경도론'

성리학적인 개념인 '권도'(權道)는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하여 상황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방도를 의미한다. 권도는 『논어』에 처음 등장하는 표현으로 공자가 그 개념을 처음 제시했고, 맹자가 정립했다. 『맹자』 권7의 「이루」(離婁) 상편의 내용이 유명하다. 하루는 맹자와 제나라 학자 순우곤(淳于?)이 대화를 나눴다.

순우곤이 물었다. "남녀가 서로 손을 주고받지 않는 것이 예입니까?"

맹자가 답했다. "그렇습니다."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건져내야 합니까?"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안 건지는 건 이리나 승냥이 따위나 하는 짓입니다. 남녀가 손수 주고받지 않는 것은 예이고, 형수를 손으로 건져내는 것은 권도이지요."

"천하가 물에 빠졌는데 왜 안 건져내십니까?"

"천하가 물에 빠지면 도(道)로 건져내고, 형수가 물에 빠지면 손으로 건져내는 것이지요. 선생께선 손으로 천하를 건져내십니까?"

중국 명나라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이 성리학의 교조성을 비판하며 완성한 양명학(陽明學)은 관념 대신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다. 조선에 전해진 양명학은 4색 당파 가운데 최명길, 최석정, 정제두 등 소론이 적극 수용하며 훗날 보재 이상설, 위당 정인보 등이 속한 '진천 강화학파'를 낳았다.

양명학이 체질화된 최명길은 권도 개념을 더욱 내재화했고, 그것은 병자호란 주화설을 주장하는 사상적 밑바탕이 됐다. 권도론과 달리 보편적인 도덕 원칙을 끝까지 강하게 고수하는 것은 경도론(經道論)이다.

 ☞용어설명

 ☞서얼: 양반남x평민녀의 자식은 서자, 양반남x천민녀의 자식은 얼자로 칭했다. 약칭해서 '서얼'.

☞삼배구고두례: 무릎을 세 번 꿇어 절을 하고 이마를 아홉 번 땅에 조아리는 것.

☞호안국: 『춘추호씨전』을 쓴 중국 송나라 때의 유학자.

☞후사: 대를 잇는 아들.

☞신도비: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망자의 생전 업적 등을 기리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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