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행정가' 임진왜란 이전 부임해 한 여인과 사랑

청주시 서문동 일대의 청주읍성을 부분 복원한 성벽(중앙공원 서쪽).
청주시 서문동 일대의 청주읍성을 부분 복원한 성벽(중앙공원 서쪽).

청주읍성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서기 685년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5년조는 '5년 3월에 서원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元泰)를 사신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역사상 청주시장 제 1호는 '원태'인 셈이다.

서원경성의 존재는 서기 689년에 처음 확인된다. 『삼국사기』 신문왕 9년조는 '9년 가을 윤 9월에 왕이 장산성에 거둥하였다. 서원경(西原京)에 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도읍을 옮기려 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다'라고 기술했다.

『삼국사기』에는 서원경 성벽을 쌓는 장면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 권47 열기(裂起) 열전은 '구근(仇近)은 원정공을 따라 서원경의 술성(述城)을 쌓았는데 원정공(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게을리 한다하여 곤장을 때렸다'라고 썼다.

『삼국사기』는 '구근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열기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김유신 지칭)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고 국사로 대접하였는데 지금 뜬소문을 듣고 나를 죄 주니 평생의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하였다'라고 덧붙였다.

구근이라는 인물이 청주성을 쌓던 중에 게으름을 피운다고 상관인 원정공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고, 때문에 인간적으로 매우 섭섭해 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때의 서원경 성터가 지금의 성안길 일대인지는 분명치 않다.
 

고려 후기부터는 분명히 존재

청주 유일의 야외 국보인 용두사지 철당간은 분명히 고려 전기부터 존재했다. 당간(☞)에 '준풍(峻豊)'이라는 고려 4대 임금 광종(재위 949~975)의 연호(☞)가 양각돼 있기 때문이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풍수적으로 '청주의 돛대'로 해석돼 후에 주성(舟城)이라는 청주의 별칭을 낳았다. 용두사지 철당간이 고려시대 청주의 중심점을 상징한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렇다고 청주읍성이 존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다.

고려 후기부터는 지금의 남문로 일대에 청주읍성이 분명히 존재했다. 『고려사』는 '공양왕 2년 5월 무오에 청주에 갑자기 뇌우가 크게 내리니 앞내가 별안간에 불어 성남문을 허물고 바로 북문에 부딪치니 성중의 물깊이가 장여(丈餘)나 되었고 관사와 민가가 표몰되기를 거의 다하였다'라고 하였다.

문헌적인 근거는 더 있다. 『고려사』 공민왕 11년 10월조는 '11년 10월 계미에 큰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를 치니 청주성 내 물이 불어 죽은 뱀이 떠다니는 것이 있었고 개구리가 나무가지에 올라갔으며 기후는 여름과 같았다'라고 썼다.

다만 고려시대 청주읍성이 토성인지 돌성[石城]인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청주읍성이 석성의 외형을 지니기 시작한 시기는 조선전기 무렵이다. 『세종실록』 지리지는 '청주읍성은 석축이고 둘레가 1천84보인데, 성안에 우물 13개가 있어 사철 마르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인용문에 '석축'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조선시대 여러 차례 개축공사

청주읍성도 모사화
청주읍성도 모사화

조선 성종대에도 석성 청주읍성의 개축 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실록』 18년 2월 19일자는 '청주(淸州)의 축성은 급한 일이 아니며, 이제 듣건대 돌 줍는 군부(軍夫)가 밀과 보리를 밟아버린다고 하니, 청컨대 우선 정지하였다가 가을을 기다려서 쌓게 하소서'라고 기록하였다.

헌종대 발간된 『청주읍지』는 일제에 의해 훼철되기 직전의 청주읍성 모습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청주읍지』는 '돌로 쌓고 1,350보이다. 포루가 8곳인데 다만 두 곳이 남아있다. 높이는 8자이며, 성안에 우물 13개가 있다. 여장은 566타가 있고, 서문·남문·북문은 모두 아치식이며, 또한 문루가 있으나, 동문은 홍예를 틀지 않았고 문루도 없다'라고 기술하였다.

이상에서 보듯 역사시대의 청주읍성은 청주 역사가 잉태된 주된 공간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청주읍성과 관련된 문학작품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점은 늘 아쉬움이 돼 왔다. 이런 아쉬움 속에서 선조대의 충청도관찰사 윤현(尹鉉·1514~1578)이 지은 칠언절구 「제증청주인(題贈淸州人)」은 청주 미래의 작은 자산이 되고 있다.

나라 살림의 1인자 소리를 듣다

윤현의 시 '題贈淸州人'(선). 국간집에 실려 있다.
윤현의 시 '題贈淸州人'(선). 국간집에 실려 있다.

윤현에 대한 전기적인 내용은 박세채(朴世采·1631~1695)가 지은 그의 묘표(墓表)와 이를 바탕으로 쓰여진 『국조인물고』, 그리고 문집 『국간집(菊磵集)』 등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돼 있다.

그의 본관은 파평, 자는 자용(子用) 또는 국간(菊磵)으로 좌의정 윤필상(尹弼商)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윤간(尹侃)이고 아버지는 윤승홍(尹承弘)이며, 어머니는 부안정 이증(李增)의 딸이다.

그는 시문에 능했지만 탁월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그는 특히 호조에서 근무할 때는 국가 재정을 아끼고, 유족하게 해 나라 살림의 제1인자 소리를 들었다. 관련 내용이 『선조수정실록』 등에 기록돼 있다.

'전 호조 판서 윤현(尹鉉)이 졸하였다. 윤현은 장원으로 급제한 자이다. 그는 처음에 문명(文名)으로 진용되었으나 재물을 관리하는 데에 재능이 있어서 집에 있을 때에는 섬세한 것까지도 아껴서 넉넉하게 하였고 조금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여러 번 호조 판서를 지내면서 재화와 곡식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빠뜨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능력에 탄복하였다.'-<『선조수정실록』 11년 7월 1일>

 

'청주성 북쪽이 모두 길이 되고 말았겠지'

그는 58세(선조 4년) 되던 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됐다. 이와 관련, 이해준(전 공주대 교수)은 충청도 감영(☞)은 임진왜란 전에는 청주, 1603년부터는 공주에 위치했다고 봤다. 그는 이때 한 여인을 사랑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훗날 그 여인을 그리워하며 「제증청주인(題贈淸州人)」라는 칠언절구 한시를 지었다. '그 여인'은 정황상 기녀일 가능성이 높으나, 윤현은 엄격했던 신분제 사회에서 그것을 초월했다.

'만남과 헤어짐은 본디 들쑥날쑥한 것(人間離合固無齊) / 눈물을 참으면서 손 놓은 것 후회로다(忍淚當時愴解携) / 꿈 속 넋 걸어갈 때 발자취가 남는다면(若使夢魂行有迹) / 청주성 북쪽이 모두 길이 되고 말았겠지(西原城北摠成蹊).'-<『국간집』>

실학의 선구자인 이수광(李?光, 1563~1628)은 이 한시가 너무 마음에 들었는지 그의 저서 『지봉유설(芝峯類說)』에 이를 수록하고 평했다. 그는 특히 마지막 구절인 결구를 높이 샀다.

"판서 윤현이 충청도의 방백이 되었을 때 청주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훗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인생살이 헤어지고 만남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눈물을 참으며 헤어질 그 때 손 놓아준 것 슬프구나. 만약 꿈속의 넋 걸어갈 때 자취가 있었다면 청주성 북쪽이 모두 길이 되고 말았을 걸세'. 오직 결구가 좋은 듯하다."-<『지봉유설』 권14 문장부>

윤현의 「제증청주인」은 시상의 흐름, 정서의 질, 상상력의 전개 등을 고려할 때 청주읍성을 대표하는 한시로 지정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눈물로 참으며 놓아준 그 손이 청주성 북쪽을 온통 꿈길로 만들줄 누가 알았겠는가'라는 시상 전개는 읽는 이의 마음을 애틋함의 절정으로 이끌고 있다.

'꿈', '잠', '밤' 시어 즐겨 사용

윤현은 다른 시에서도 '꿈', '잠', '밤' 등의 시어를 즐겨 사용했다. 그의 또 다른 한시인 '삼학사 절간에 머무르며'(遊梵宇三學寺)라는 한시에도 정적이면서 애틋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돌에 부딛힌 물방울 봄여울을 울리고(亂石鳴春溜) / 구름 차츰 걷히면서 산모습 드러나네(孤雲O多岑) / 솔 사립문 닫아건 체 중들은 자고(松扉僧閑久) / 숲 사이 작은 길로 손님이 오네(林逕客來深) / 등덩굴 오래 되어 담에 얽히고(藤老過墻蔓) / 종소리 절 밖으로 올려 퍼지네(鐘淸出寺音) / 밤이 돼 절간 자못 고요한데(夜來山賴寂) / 염불소리 세상 잡념 흩어놓는구나(禪話散塵襟).-『국간집』

청주시는 중앙공원 서편에 청주읍성 일부 성벽을 복원했으나 덩그라니 석조물만 위치하고 있다. 그 공간에 윤현의 「제증청주인」을 시비를 세워 그 애틋함을 알리면, 청주 최고의 연인(戀人) 공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성벽과 인문학의 만남은 청주읍성 명소화를 한껏 견인할 것이다. 

 

☞용어설명 

☞당간: 절에서 깃발(幢)을 거는 깃발대(幢竿)를 말한다. 당간을 고정하는 것은 당간지주이다.
☞연호: 군주시대에 특정 임금의 재위 기간에 붙이는 칭호를 일컫는다.
☞감영: 지방장관인 관찰사의 근무지나 관아를 말한다.

 

◆ 우리나라 읍성은 왜 여말선초에 많이 출현?

해미읍성 전경
해미읍성 전경

우리나라 방어시설은 대략 청동기시대 환호(環濠)를 시작으로 토성(土城), 산성(山城). 읍성(邑城), 관문성(關門城), 전축성(塼築城) 순으로 발달하였다. 이중 읍성은 고려말~조선초기에 출현하였다. 관문성은 조령 삼관문, 전축성은 수원화성이 대표적이다.

읍성이 여말선초에 출현한 것은 왜구의 준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 후기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왜구는 기동력이 뛰어나 삽시간에 해안 주변의 촌락을 공격했다. 이때 촌락민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으로 도피하는 것은 그만큼 위험에 노출되는 시간이 된다.

그래서 여말선초부터 단시간에 대피할 수 있도록 평지성, 즉 읍성을 쌓기 시작했다. 현존하는 해미읍성, 낙안읍성 등은 모두 왜구가 출몰하던 시기에 축조된 평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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