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 '만소만록'에 식인풍속 기록

1590년 7월 중세 일본 100년 내전인 센고쿠(戰國) 시대(☞)에 마침표가 찍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이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마저 무릎 꿇리고 일본 열도를 통일했다. 조선 선조 조정은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로 조선통신사를 구성, 일본을 정탐하게 했다. 이듬해 3월 일본에서 돌아온 두 사람은 선조에게 정반대의 내용을 보고했다.
 

청주 수의동 묵방산 자락의 송산현 유적지. 우측 구사당(충렬묘), 가운데 신사당(충렬사), 좌측 천곡기념관. 드론 촬영.
청주 수의동 묵방산 자락의 송산현 유적지. 우측 구사당(충렬묘), 가운데 신사당(충렬사), 좌측 천곡기념관. 드론 촬영.

 

선조, 고민없이 집권당을 편들다

'황윤길이 그간의 실정과 형세를 치계하면서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복명(復命)한 뒤에 상이 불러 하문하니, 황윤길은 전일의 치계 내용과 같은 의견을 아뢰었는데 김성일(金誠一)이 아뢰기를,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일의 마땅함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하였다.'-<국조보감 권30, 선조 24년>

선조는 두 사람의 보고 가운데 부사 김성일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당시는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막 세포분열을 하던 시기로 집권당은 동인이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동인에 속했다. 선조는 고민 없이 집권당의 손을 들어줬다.

그해 5월부터 부산 왜관에 거주하던 일본인의 수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왜는 임진왜란 개전에 앞서 자국민에 대한 철수 조치를 취했으나, 선조 조정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관(館)에 머물던 왜인이 항상 수십 명이었는데 점차 일본으로 되돌아가 임진년 봄에 와서는 온 왜관이 텅 비게 되었다.'-<선조수정실록 24년 5월 1일>

 

조공하러 온 왜선으로 알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혹은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날 부산첨사 정발(鄭撥, 1553~1592)은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배가 새까맣게 몰려오자 조공하러 온 왜선으로 알고 대비하지 않았다. 그가 사냥을 끝내고 부산진으로 돌아오니 왜군은 이미 성벽을 오르고 있었다.

'적선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첨사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선조실록 25년 4월 13일>

동국신속삼강행도(1617)의 '상현충렬' 삽화. 송상현은 동래성이 함락되자 관복을 바르게 갖'추어 입고 죽음을 기다렸다.
동국신속삼강행도(1617)의 '상현충렬' 삽화. 송상현은 동래성이 함락되자 관복을 바르게 갖'추어 입고 죽음을 기다렸다.

이튿날 왜군은 천곡(泉谷)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이 부사로 있는 동래성을 공격했다. 『노봉집』(老峯集, ☞)은 그날의 개전 장면을 '적군은 먼저 백여 명의 사람을 시켜 나무패 하나를 가져다가 남문 밖에 세워 놓고 물러갔다. 송상현이 군관 송봉수(宋鳳壽) 등으로 하여금 나가서 보게 하였는데,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을 테면 길을 빌려 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고 쓰여 있었다. 송상현 또한 나무패에 '싸우다 죽는 일은 쉽지만,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라고 여섯 글자를 써서 적진 한가운데로 던졌다'라고 기술했다.

송상현은 한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자 관복을 입고 왜군의 칼을 기다렸다. 애첩 김섬(金蟾)도 그 옆에 앉아 최후를 기다렸다. 그의 마지막 고민은 나라에 대한 '忠'을 위해 부모에 대한 '孝'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청주 수의동 묵방산 자락의 송상현묘. 앞 우측은 함께 순절한 애첩 김섬, 좌측은 또다른 애첩 양녀묘. 드론 촬영.
청주 수의동 묵방산 자락의 송상현묘. 앞 우측은 함께 순절한 애첩 김섬, 좌측은 또다른 애첩 양녀묘. 드론 촬영.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포위당한 외로운 성, 달은 희미한데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가노(家奴)에게 주어 그의 아비 송복흥(宋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선조수정실록 25년 4월 14일>

이 날짜 『선조수정실록』 기사는 그의 애첩 2명의 마지막을 '상현에게 천인(賤人) 출신의 첩이 있었는데, 적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굴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왜인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상현과 함께 매장하고 표(表)를 하였다. 또 양인(良人) 출신의 첩도 잡혔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공경하여 별실(別室)에 두었다가 뒤에 마침내 돌아가게 하였다'라고 적었다.

임진년 이후 매년 4월 15일이 돌아오면 부산지역에서 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1608년 동래부사 후임자로 온 이안눌(李安訥, ☞)은 '4월 15일'이라는 한시의 일부를 이렇게 적었다.


'그래서 해마다 이날만 되면 / 상을 차려 죽은 이를 곡한답니다 / 아비가 제 자식을 곡을 하구요 / 아들이 제 아비를 곡을 하지요 / 할아비가 손주를 곡을 하구요 / 손주가 할아비의 곡을 합니다 / 어미가 제 딸을 곡하기도 하고 / 딸이 제 어미를 곡하기도 하지요 / 지어미가 지아비를 곡하는가 하면 / 지아비가 지어미를 곡한답니다 / 형제나 자매를 따질 것 없이 / 살아 있는 이들은 모두 곡을 합지요 / 이맛살 찡그리며 듣다가 말고 /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네 / 아전이 나서며 아뢰는 말이 / 곡할 이나 있다면 덜 슬픕지요 / 칼날 아래 온 집안이 죄다 죽어서 / 곡할 이도 없는 집이 얼마인뎁쇼'-<동악집(東岳集)>

 

우리나라 전란사 중 가장 참혹한 광경

동래성을 돌파한 왜군은 3진으로 나눠져 북상했다. 제 1진은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 2진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3진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끌었다. 이중 구로다가 이끄는 제 3진이 창원-성주-금산-영동-옥천-보은-청주 방향으로 올라왔다. 구로다는 당시 25살 나이로 1만2천명 왜군을 이끌었다. 구로다의 왜군은 5월부터 7월말까지 3개월 가량 청주성을 점령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헌의 활약상을 그린 항의신편의 청주파적도(1625). /디지털 장서각.
임진왜란 당시 조헌의 활약상을 그린 항의신편의 청주파적도(1625). /디지털 장서각.

이 기간을 전후해 충청도에서 우리나라 전란사 중에 가장 참혹한 광경이 벌어졌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는 윤국형(尹國馨, 1543~1611)이었고, 충청감영(☞)은 청주에 있었다. 그는 재임기간 목격을 『문소만록』(聞韶漫錄)이라는 문집으로 남겼고, 여기에는 식인(食人) 풍속이 다수 등장한다. 정확한 뜻 전달을 위해 원문을 함께 적는다.

'시체는 들에 가득하고 매장된 것은 거의 없었다. 아비가 자식을 팔고 남편이 아내를 팔았으며, 계사년 봄에는 사람들끼리 서로 잡아먹고 시체를 쪼개어 앞을 다투어 먹었으며, 골육지간끼리도 서로 죽이는 자도 있었으니, 우리 동방의 변란의 화가 참혹함이 오늘과 같은 때는 없었다(積尸遍野。收?者無幾。父而賣子。夫而?妻。至於癸巳春。則人相殺食。斫尸爭?。骨肉亦有相?者。自有東方變亂之禍).'-<문소만록>

계사년은 임진왜란 발발 1년 후인 1593년이다. 백성들이 너무 많이 죽다보니 가을이 돼도 수확을 하지 못하는 등 들녘도 황폐화했다.

'계사년에는 모를 심은 곳은 풍년이 들었지만, 중외의 들판에는 쑥대만 우북하고, 모심은 곳이 3분의 1도 안 되어 흉년이나 다름이 없었다. 갑오년에는 모심은 것이 계사년에 비해서 조금은 많았으나, 굶주리고 병들어 죽은 자가 반이 넘었기 때문에 김을 맬 사람이 없어서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었지, 하늘이 풍년이 들지 않게 한 것은 아니었다.(癸巳付種處則頗熟。但中外原野。蓬蒿極目。付種未滿三分之一。與凶年無異。甲午則付種視癸巳稍多。飢病死者過半。不能鋤耘。秋無所穫。非天時不熟也)'-<문소만록>

오희문의 일기인 『쇄미록』에도 임진왜란 기간의 식인 모습은 자주 등장한다. 전란이 길어지자 우리고장에서도 이른바 왜군으로 가장하고 협력하는 가왜(假倭)와 부왜(附倭) 현상이 나타났다.

'정원이 회계(回啓)하기를, "음성현(陰城縣)에 나타났다는 적은 충주(忠州)에서 올라온 왜적이요, 황간(黃澗)에 나타났다는 적은 우리 나라 사람이 왜인으로 가장한 듯합니다.'-<선조실록 25년 5월 12일>

'충주의 사기장(砂器匠) 한막동(韓莫同)은 왜놈의 첩자가 되어 중국군을 염탐하였다고 하니, 대단히 흉악합니다. 즉시 목을 베어 효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선조실록 26년 6월 12일>

임진왜란 왜군 북진로. / 지도로 보는 임진왜란
임진왜란 왜군 북진로. / 지도로 보는 임진왜란

인용문의 중국군은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의 군대를 말한다. 늘 그래왔듯이 전쟁은 정신과 물질 모든 것을 파괴하고 황폐화시켰다. 왜도 임진왜란 중에 도요토미 정권하고 붕괴하고, 얼마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江戶) 정권이 들어섰다. '전쟁은 모두를 패자로 만든다'는 역사의 교훈은 임진왜란에도 적용됐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학교 사학과 박사)
 

전라도 출신 송상현이 왜 청주에서 영면할까

 송상현의 본관은 여산(礪山 ☞)이며, 그의 고향은 전라도 고부였다. 그는 사망 3년 후인 1595년(선조 28) 고향인 아닌, 청주시 수의동 묵방산 자락으로 반장(返葬 ☞)됐다. 일부에서는 "당대 최고 풍수지리가인 명나라 두사충(杜師忠 ☞)이 명당을 잡아줬다"라고 말하나, 근거는 없다.

송상현의 부인 성주이씨가 모종의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부인 성주이씨는 『묵재일기』와 『양아록』으로 유명한 이문건(1494∼1567)의 손녀로, 당시 그의 외가와 친정 모두는 청주에 세거하고 있었다. 이문건의 유품 대부분은 충북대박물관에 기탁돼 있다.

부인 성주이씨는 송상현이 41살 나이로 사망하자 젊은 시동생을 대신에 가계를 운영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외가와 친정이 포진하고 있는 청주를 남편의 반장지로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절영도: 지금의 부산 영도.

☞노봉집: 조선후기 김정의 시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시문집.

☞충청감영: 당시 충청감영은 충주가 아닌 청주에 위치하다 임진왜란 후 공주로 이전.

☞여산: 지금의 전북 익산군의 여산면과 낭산명 지역.

☞반장: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그의 고향으로 옮겨서 장사를 지냄.

☞두사충: 임진왜란 때 이여송을 따라 들어온 명나라 장수로 풍수지리로 더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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