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문신의 몫"… 무신 중 유일 반역열전에 기록 안돼

앞 부분이 경대승 묘, 뒤는 아버지 경진 묘로 모두 초혼묘이다. 청주 지북동 산32-3에 위치한다. 

133년(인종 11) 고려는 국자감(☞) 전공과목의 하나였던 무학재를 폐지했다. 과거제도에 무과는 없었지만 국자감의 무학재를 나오면 하급 군관이 되기 쉬웠다. 인종은 고려의 청년들이 군관이 되기위해 무학재로 몰리자 무신의 기세가 올라갈 것을 우려, 이를 선제적으로 폐지했다.

인종 때 김부식(『삼국사기』 저자)의 아들 젊은 김돈중(金敦中)이 나이 많은 무신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태우는 사건이 일어났다. 의종은 연회를 위해 개성 근처 보현원에 가는 도중 신하들에게 '수박회'(☞) 겨루기를 시켰다. 늙은 무신 이소응(李紹應)이 힘이 빠져며 뒤로 물러나자 문신 한뢰(韓賴)가 그의 뺨을 때렸다. 이소응이 섬돌 아래로 굴러 떨어지자 왕과 문신들이 박장대소 했다. '무신들은 얼굴빛이 변하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고려사』 반역 열전, 정중부).

이날 우리나라 정치사의 최고 암흑기를 가져온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무신들은 의종을 모시고 보현원에 온 문신들에게 마치 잡초 베듯 칼을 휘둘렀다. 무신들은 개성으로 돌아와 다시 50여명의 문신을 살해했다.

1170년 무신정권이 수립됐다. 고려 무신들은 정권을 잡았지만 왕 자리를 없애지는 않았다. 고려 무신정권은 그런 면에서 일본 막부(幕府) 정권과 유사했다. 일본 쇼군(將軍)은 정권을 잡았지만 천황 자리는 없애지 않았다.

고려 무신들은 그 속성이 난폭했고 탐욕스러웠다. 고려 무신들 사이에 통일신라 하대와 비슷한 '권력 쟁탈전'이 일어났다. 정중부가 이의방을, 경대승이 정중부를, 최충헌이 이의민을, 김준이 최의를 임연이 김준을 죽이고 집권했다.

◆최고 권력자 정중부를 제거하다

고려 광종 13년(962)에 건립된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에는 당시 건립을 주도했던 金·孫·慶·韓 등 4개 성씨가 보인다. 고려초기 청주의 유력 호족 성씨이다. 1179년 청주 유력 성씨의 후손인 경대승(慶大升, 1154∼1183)이 당시 최고 권력자 정중부를 죽이고 고려 실권자(實權者) 자리에 올랐다.

"경대승은 왕에게 금군(禁軍)을 출동시켜 정중부와 송유인(宋有仁) 부자를 체포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중부 등이 변고를 듣고 도망쳐 민가에 숨어 있었지만 모두 체포하여 목을 베고 저자에 효수(梟首)하였다."-<『고려사』 열전, 경대승>

경대승은 음서(☞)로 초급 군관인 교위(정9품)가 되었다. 고려사는 경대승에 대해 "완력이 남보다 뛰어났고, 일찍부터 큰 뜻을 품었다"(열전)라고 적었다. 그의 아버지 경진(慶珍)은 중서시랑 평장사(정2품)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둘을 감안하면 경대승은 타고난 신체적 조건에 부친의 후광을 입어 군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경대승이 당시 최고 권력자 정중부를 제거한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감정설, 정중부 일가의 탐학 응징설 등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1178년(명종 8년) 청주에서 대규모 패싸움이 일어났다. 토착 청주인과 경적(京籍)을 갖고 있으면서 청주에 내려와 살던 사람들 사이에 커다란 싸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경적 청주인이 거의 죽었다. '경적 청주인'이면서 청주 사심관을 겸하고 있던 경대승은 사사(死士☞)를 모집하여 왕명인양 교서를 위조해 청주로 향했다.

"개경에 남아있던 나머지 무리들이 소문을 듣고 원수를 갚고자, 왕의 교서(敎書)를 위조하여 결사대[死士]를 모아서 청주로 향하였다. 왕이 장군 한경뢰(韓慶賴) 등을 보내 쫓아가 멈추도록 했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그들은 청주 사람들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사망자가 100여 명이나 되었다. "-<『고려사절요』12, 명종 8년 3월>

경대승은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하고 사심관에서도 파면됐다. 당시 집권자가 정중부였다. 사심관은 서울에 있으면서 자신의 연고지에 각종 영향력을 행사하던 관직을 말한다. 주로 인사 분야의 간섭을 많이 했다. 당시 청주에서 왜 집단 패싸움이 일어났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청주 사심관으로 있던 점으로 미뤄 청주의 헤게모니를 놓고 청주토착 세력과 재경(在京) 청주인이 갈등했을 개연성이 높다.

후자는 열혈 청년 경대승이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 등 정씨 일가의 전횡과 탐욕에 극도의 반감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중부는 의종의 별장을 차지했으며, 정균은 명종의 공주를 자기처로 만들려 했고, 송유인은 왕의 별궁 '수덕궁'을 자기집으로 만들었다.
 

■경대승은 왜 정중부에 '칼'을 겨눴을까
■경대승은 왜 정중부에 '칼'을 겨눴을까


 ◆학식 겸비 못한 무신은 배제

1449년 조선 세종은 김종서, 정인지 등 대신에게 『고려사』를 편찬하도록 명령했다. 대신들은 고려사의 바탕 사료가 된 충주읍성의 『고려실록『을 우마차로 한양으로 옮겨 고려사를 편찬했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초기 성리학자들은 무신정변을 일으킨 고려의 무신들을 하나같이 『고려사』반역 열전에 올렸다. 다만 경대승한 사람만 『고려사』일반 열전에 실었다. '싹수 있는 무인'이라는 의미다.

 고려의 실권자가 된 경대승은 "정치는 문신이 해야지 무신이 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고(a), 무인들의 불법에 분개하였고 학식을 겸비하지 않은 무관은 중용하지 않았다(b). 

 '신은 글자를 몰라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고려사』 열전, 경대승).
 '신은 글자를 몰라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고려사』 열전, 경대승).

 (a):  "경대승이 말하기를, "신은 글자를 몰라 감히 바랄 바가 아니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경이 아니면 누가 하면 좋겠는가? 이부시랑(吏部侍郞) 오광척(吳光陟)은 어떠한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승선은 왕명을 출납하는 직이니, 유학(儒學)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합니다. 오광척이 비록 글은 조금 알기는 하지만, 역시 무신(武臣)이니 정균과 같아질까 두렵습니다."라고 하니, 왕은 아무 말이 없었다."-<『고려사』 열전, 경대승>

 '복고(復古)에 뜻이 있어 문관들이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고려사절요』)라는 표현이 보인다.
 '복고(復古)에 뜻이 있어 문관들이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다'(『고려사절요』)라는 표현이 보인다.

(b): 항상 무인들의 불법(不法)한 일에 분개하였는데, 개연(慨然)히 복고(復古)에 뜻이 있어 문관들이 의지하며 중하게 여겼고(중략)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따르고 붙었지만 학식과 용기와 지략이 있지 않은 자는 번번이 거절하니 무관들이 두려워하고 꺼려했으나 감히 방자하게 하지 못하였다."-<『고려사절요』, 명종 13년 7월>

역사학계는 그의 이런 한 행동을 '경대승의 복고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경대승은 이 같은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일체의 관직을 갖지 않고 자기집으로 돌아갔고, 무신들 사이에 권력 쟁탈권이 계속 되고 있는 만큼 '도방'(都房)이라는 경호조직을 운영했다.
 

◆장례 때 통곡 않는 사람 없어

경대승 초혼묘에서 바라본 청주 지북동 일대.
경대승 초혼묘에서 바라본 청주 지북동 일대.

 경대승이 당시 정치세계에서 완전히 발을 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정의 큰 결정이 있을 때는 궁궐에 나가 본인 입장을 밝혔고 관철시켰다. 송시열(宋時烈)이 괴산 화양구곡에 있으면서 조선 숙종대 정국을 쥐락펴락 한 것과 비슷한 일면이 있다.

 "얼마 후 사직하고 집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조정에 나아가 결정에 관여하였다."-<『고려사』 열전, 경대승)

 청년 장군 경대승은 길지 않은 5년여 집권을 했다. 그는 정중부가 칼을 잡고 큰 소리로 꾸짖는 꿈을 꾼 후 병을 얻어서 죽었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고려사』열전은 "장례를 지내는데 길에 슬피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大升忽夢仲夫握劍叱咤 因得疾卒 年三十 及葬 道路莫不哀哭)"라고 적었다.

 경대승의 좋은 이미지는 현대의 역사 사극으로 이어졌다. 2013년 KBS는 경대승이 사실상 주인공인 대하 드라마 '무인시대'를 이듬해 4월까지 158부작으로 방영하였다. 경대승 역은 박용우, 정중부 역 김흥기, 이의민 역 이덕화, 최충헌 역 김갑수 씨 등이 맡았다.

 2013년 청주경씨 문중은 사극의 좋은 이미지에 고무돼 상당구 지북동 산 32-3에 경대승 초혼묘를 조성했다. 초혼묘는 혼을 불러다 쓴 무덤으로 달리 '헛묘'라고 한다. / 조혁연 대기자(충북대 사학과 박사)

 

☞국자감: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이다.

☞수박회: 한국 고유의 무술로, 택견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음서: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사사(死士): 목숨을 건 용감한 무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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