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죽은 아내 향한 애틋함 묘지명에 새겨 무덤속으로

고려 조정은 만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자 왕릉 그리고 국사와 왕사묘에만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 그러자 고려 지배층 사이에는 묘지명(墓誌銘) 장례 풍속이 크게 유행했다. 묘지명은 죽은 이의 공덕과 안식을 돌, 벽돌, 도자기 위에 글로 새겨 무덤 안에 넣어주는 것을 말한다. 묘지명 문장은 크게 '지'(誌)와 '명'(銘)으로 구성됐다. '지'는 죽은 이의 생전 이력을 산문으로, '명'은 망자에 대한 위로와 안식의 염원을 시(詩)로 새겼다.

 

최루백, 충주와 청주에서 관료생활

최루백이 먼저 죽은 아내를 위해 만든 염경애 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최루백이 먼저 죽은 아내를 위해 만든 염경애 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 고장과 인연이 있는 묘지명으로는 고려 여인 염경애(廉瓊愛 , 1100∼1146)와 조선 여인 김돈이(金敦伊, ?∼?, 공식명칭 김씨묘지명) 것이 있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남편인 최루백(崔婁伯, ?∼?)과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먼저 죽은 아내를 위해 각각 돌과 백자로 묘지명을 만들어 무덤 안에 넣어주었다.

염경애 묘지명의 재료는 돌이고 크기는 세로 30cm, 가로 69cm, 글자 크기 1.2cm이다, 고려시대 여성의 호칭은 대부분 'OO처 OO씨' 정도로 기록됐으나, 염경애가 만큼은 거의 유일하게 자기이름 석자가 온전히 드러났다. 남편 최루백은 먼저 죽은 아내를 그만큼 사랑했고 배려했다. 묘지명에는 해마다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제사를 정성껏 모신 것에 대한 고마움이 잘 드러나 있다.

'최루백은 그 무덤에 기록하여 이른다.(중략)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섬기지는 못하였으나 명절·삼복·납향(☞)이면 매번 몸소 제사를 올렸고, 아울러 일찍이 스스로 길쌈하고 조금씩 모아서 손수 저고리 하나 혹은 바지 하나를 지어 제삿날에 이를 때마다 영위(☞)를 설치한 뒤 절하며 진헌하였다. 이윽고 재(齋)에 나아가 무리가 많든 적든 버선을 만들어서 모두 승려들에게 시주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잊을 수 없는 일이다.'-<염경애 묘지명>

 

"아내가 해주던 그 음식맛이 아니다"

탁본한 염경애 묘지명. 최루백이 관직을 거친 '중원'(충주), '청주' 등의 지명이 나온다. '청주부사'(정4품)는 오늘날 청주 부시장에 해당한다.
탁본한 염경애 묘지명. 최루백이 관직을 거친 '중원'(충주), '청주' 등의 지명이 나온다. '청주부사'(정4품)는 오늘날 청주 부시장에 해당한다.

그는 아내의 내조에 대해서는 '여러 번 관직의 차서(次序)를 옮기며 계속해서 후한 녹을 먹었는데, 집안의 옷과 음식을 돌아보면 오히려 아내가 힘써서 구하던 때만 못하니, 누가 아내보고 재주 없다고 하겠는가'라고 애틋함을 나타냈다.

최루백은 하급 관료 때는 충주, 의종 2년 때는 청주목의 부사(副使☞)로 근무하는 등 우리고장과도 인연이 적지 않다. 청주목 부사는 지금으로 치면 청주 부시장에 해당한다.

'옛날에 내가 나가서 패주(貝州)와 중원(中原)의 수령이 되었을 때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을 꺼리지 않고 함께 천 리 길을 갔고(중략), 무진년(의종 2년, 1148) 봄 예부낭중으로 옮겼고 곧 청주부사(淸州副使)에 제수되었다.'-<염경애 묘지명>

그는 아내 염경애가 고생만 하다가 47살 이른 나이에 병으로 죽자 그 애틋함을 검은 돌에 구구절절하게 새겼다. 묘지명 '명' 부분은 23년간 가난을 함께 하며 말없이 자신의 옆을 지켜 준 아내에 대한 애통함과 안식을 바라는 마음이 담겨져 있다.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 / 아직 함께 무덤에 묻히지 못하는 일이 매우 애통하도다. / 아들 딸들이 기러기처럼 뒤따르니 / 부귀가 대대로 창성할 것이로다.'-<염경애 묘지명>
 

이문건 유배중에 몰래 괴산에 집지어

이문건이 만들어 무덤에 넣어준 아내 김돈이 묘지명 부분. 충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문건이 만들어 무덤에 넣어준 아내 김돈이 묘지명 부분. 충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문건은 을사시화에 연좌돼 고향 성주로 유배됐다. 친조카 이휘(李輝, ?∼1545)가 이른바 '임금은 어진 인물을 선택해서 세워야 한다'는 택현설(擇賢說)을 주장했다가 능지처참 됐고, 이문건은 이에 연좌되어 고향 경북 성주로 유배됐다. 그는 "곧 풀리겠지"라는 기대감 속에 처가가 있는 지금의 충북 괴산군 문광면 대명리 둑시 마을에 새 집을 지었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면 괴산에서 살 생각으로 건축 현장을 몰래 3번이나 찾기도 했다.(a) 집이 완공된 후에는 노비를 시켜 괴산 집에 꽃도 심었다.(b) 그가 17여년간 쓴 『묵재일기』 내용의 일부다.

(a): '서동이 괴산에서 돌아왔다. 목재를 계곡 근처로 끌어다 놓았으나 계곡의 물이 없어서 내려 보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1551년 7월 15일)'. '오늘 괴산에서 기둥을 세운다고 하는데, 비가 오니 일이 좋지 않겠다(1552년 4월 25일)'.

(b):'아랫집에 가서 모란, 해당화의 뿌리를 캐어 괴산에 가져가도록 하였다(1552년 10월 10일)'. '서동이 괴산에서 돌아왔다. 전에 옮긴 목련과 해당화가 생기가 있다고 한다(1553년 2월 14일).'-<묵재일기>
 

이문건묘, 2012년 괴산 문광으로 이장

묵재 이문건 묘소. 괴산군 문광면 대명리 산47(둑시마을).
묵재 이문건 묘소. 괴산군 문광면 대명리 산47(둑시마을).

그는 끝내 풀려나지 못했다. 그는 유배생활 23년째인 1567년 성주에서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현재 이문건의 직계 후손들은 괴산, 청주, 증평 등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2012년 묵재 후손들은 성주의 이문건 부부묘를 새집을 지었던 괴산 둑시 마을 뒷산으로 이장했다. 이장 작업 과정에서 철릭(帖裏☞), 김돈이 묘지명, 모자, 백자 항아리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김돈이 묘지명은 6장(1초∼6초)의 백자에 앞뒷면 양면에 '명'과 '지'의 글을 지었고, 크기는 가로 17㎝, 세로 23㎝, 두께 3.5㎝다. 묘지명은 아내 가계, 자녀 탄생과 양육, 내조에 대한 고마움 등의 마음을 새겼다. 염경재 묘지명은 다른 것과 달리 '명'(한시)을 먼저 적었다. 아내를 먼저 보내는 것에 대한 절절함이 시 곳곳에 배어 있다.

'내 어찌 가난함을 걱정하랴? / 내조가 이처럼 어진데, / 아내의 자질과 성정이 곧고 밝으니 / 이는 하늘에서 부여받은 성품이다. / 규방의 본을 어기지 않았는데 / 복을 받은 것은 왜 이다지도 불공평한가? / 아이를 낳으면 시들어 떨어지고 / 일마다 어려움이 많았다. / 비록 고희까지 누렸으나 / 고질병에 빠지고 항상 물이 끓는 듯했다. / 외로운 손자의 혼사를 의논하다가 / 가연(佳緣)을 매듭 짓지 못했다. / 명운이 궁벽하여 / 누리지 못하고 갑자기 떠났다. / 이제 여인의 삼종지도를 멀리하고 / 연고가 깊은 산으로 돌아간다. / 유택이 이미 아름답고 / 온(아들)의 묘가 앞에 있네. / 오오! 어진 배필이여 / 어찌 먼저 가는가? / 신체와 혼백이 영원히 편안하게 / 만년토록 쉬소서! / 늙은 홀아비 묵재 휴수 쓰다.'-<김돈이 묘지명> 이문건 후손들은 철릭, 김돈이 묘지명 등을 개인이 계속 보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 유물을 충북대학교박물관에 기탁했다. 충북도는 2014년 이들 유물을 일괄 도유형문화재로 지정했다.

최루백과 이문건은 아내에 대한 순애보는 한결 같았을까. 남편 최루백 묘지명도 현존하고 있다. 이 묘지명을 보면, 최루백은 '믿음으로써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리라'라는 다짐과 달리, 몇 년 후 유씨(柳氏)와 재혼해 3남 2녀를 얻었다.

이문건은 기생 '종대'와 어찌어찌한 스캔들을 일으키고 "그게 어째서"라는 식으로 되레 큰 소리를 뻥뻥 쳤다. 그가 남긴 『묵재일기』 구절이다.

'멀지도 않은 곳에 있으면서 어째서 밤에 기생을 끼고 남의 집에서 잤수. 어찌 이것이 늙은이가 할 짓이란 말이오. 왜 아내가 상심해서 잠도 못자고 밥도 못 먹으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단 말이오. 나도 부드럽게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 격앙되어 어긋장을 놓았으니 오히려 가소롭다. 밤이 되어 비로소 물에 만 밥을 먹고 잤다(1552년 11월 21일)'.

'낮에 누워서 아내한테 농담을 하였다. "기생 가운데 잘 생긴 아이가 없다오". 그러자 아내가 노하면서 말하였다. "종대가 또 생각나서 그런 것이지요" 하면서 아래채로 내려가 버렸다. 가히 질투 잘하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152년 11월 28일).'
 

☞납향: 한 해 끝 무렵 지은 농사 형편과 그 밖의 일들을 여러 신에게 알리며 지내는 제사.

☞영위: 위패나 신위의 다른 말.

☞부사(副使): 부령(副令)으로도 불렸다. 보통 목의 부사는 정4품을 파견.

☞철릭: 상의와 하의를 따로 구성하여 허리에서 연결시킨 포(袍)로, 지금의 원피스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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