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철령위' 설치 야욕 외교로 방어… 3단계 논리로 명태조 설득

박의중의 수석 합격을 알렸는 방은 당시 취경루(현 중앙공원 망선루)에 붙었다. 드론 촬영.

고려 공민왕은 수도 개경으로 환궁이 늦어지자 1362년 임시수도인 청주읍성에서 '임인 문과방목'이라는 과거를 실시했다. 이때 장원 급제한 인물이 박의중(朴宜中, 1337~1403)으로, 당시 청주읍성 취경루(현 중앙공원 망선루)에 방이 붙었다. 당시 26세였다.

『고려사』 권73에 '11년 10월 우시중 홍언박(洪彦博)이 지공거(☞), 지도첨의 유숙(柳淑)이 동지공거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박실(朴實) 등 33명에게 급제를 내려주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고려사는 박의중이 수석 합격을 했다는 의미로 '박실 등 33인 급제'라고 기록했다. 박실은 박의중의 어릴적 이름이다.

박실은 박의중의 어릴적 이름인 초명이다. 박의중이 장원 급제를 하자 당시 동지공서였던 유숙이 '장원한 문생 박의중에게 주며(次韻贈朴宜中壯元門生)'라는 제목의 시를 내리고 축하했다.

'왕업이 중흥하여 동한 유씨 같은데 / 나라 정사 다스릴 이 이윤과 주공 있어라 /…/ 그대 나이 젊고 재명이 성하니 / 한가한 사람들처럼 물외(物外)에 놀지 마소'-<『동문선』>

시어 중 '물외'는 속세 바깥, 즉 안빈낙도하는 삶을 말한다. 지공거 유숙은 일찌기 박의중의 출중함을 알아보고 나라의 동량이 돼줄 것을 당부했다.

이성계의 5불가론

명나라라는 원나라가 설치했던 쌍성총관부 자리에 철령위를 설치하려 했다. 네이버 포토 자체 수정.

14세기 중반 원나라가 쇠퇴하면서 동북 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원나라가 대륙의 새로운 패자가 됐고, 원나라는 초원으로 물러났다. 명나라는 원나라가 설치했던 쌍성총관부 지역(함경도 일대)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하겠다며 고려에 반환을 요구했다.

1356년(공민왕 5) 고려 공민왕은 이 지역을 탈환하고 화주(和州) 설치, 영토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명나라가 대륙의 새로운 패자가 됐다고 하나 요동 일대는 명의 통치력이 완전하게 미치지 않고 있었다.

1388년 고려 우왕은 조민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로 삼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 그 유명한 이성계의 4불가론이 등장한다.

이성계는 ①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으며 ②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이 부적당할 뿐 아니라 ③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고 왜구가 창궐할 것이며 ④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병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며 요동 공격을 반대했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거론했지만 외교적인 내용까지 포함하면 '5불가론'이 존재했다. 『태조실록』 1권 총서는 '지금 철령위를 세운다는 말을 듣고, 밀직제학 박의중을 시켜서 표문(☞)을 받들어 품처를 계획했으니, 대책이 매우 좋았습니다.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 갑자기 큰 나라를 범하게 되니,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의 복이 아닙니다.'라고 적었다.

인용문 중 '지금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는 지금 철령위 문제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박의중을 명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답변을 듣지 않고 요동 정벌에 나서는 것은 나라와 백성에 모두 안 좋다는 의미다.
 

3단계 논리로 명태조를 설득하다

명나라 황궁에 들어간 박의중은 ①~③의 3단계 논리로 명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 설득했다.

①"조종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데에 구역이 정해져 있으니, 철령 이북을 살펴보면, 역대로 문주·고주·화주·정주·함주 등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公?鎭)에 이르니, 원래부터 본국의 땅이었습니다."-<『고려사』 권37>

②지정(至正) 16년(1356) 사이에 원(元) 조정에 아뢰어, 윗 항의 총관과 천호 등의 직을 혁파하고, 화주 이북을 다시 본국에 속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 주현의 관원을 제수하여 인민을 관할하게 하였습니다.-<『고려사』 권37>

③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넓은 도량으로 포용하시고, 두터운 덕으로 어루만져 주셔서, 몇 개 주의 땅을 하국(下國)의 땅으로 삼아 주십시오. 신은 삼가 더욱 나라를 다시 만들어주신 은혜[再造之恩]에 감읍하며 만수무강을 항상 축원하겠습니다."-<『고려사』 권37>

명태조는 박의중의 인품과 명론에 감동되어 철령위 설치 의사를 철회하고 그에게 고려의 공자라는 뜻으로 '해동부자(海東夫子)'라는 칭송을 주었다.

박의중이 강동6주(☞)를 획득한 서희의 담판에 비견할만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귀국길에 올랐다. 일행이 요동에 이르렀을 때 위화도에서 회군,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의중은 수행원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의연하게 혼자 말을 몰고 귀국했다.

'박의중이 요해(遼海)에 도착하자 수행원들은 요동에서 잡힐까 두려워하여 도중에 모두 도망쳤다. 박의중은 홀로 말을 타고 요동에 도착했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고려사』 박의중 열전>.

1389년(창왕 1) 고려 창왕은 철령위 철폐를 관철한 박의중에게 '추성보조공신'이라는 호를 내리고, 문의군(文義君)에 봉했다. 실학자 이익(李瀷, 1629~1690)은 『성호사설』에서 이 부분을 높이 평가, '만일 박의중이 항변을 잘하지 않았다면 우리 영토의 절반을 잃어버릴 것은 뻔한 일이었다. 공자가 "사신이여, 사신이여!"라고 한 말은 의중에게 합당하다 하겠다'라고 밝혔다.

 

대지국사탑비 비문을 짓다

대지국사탑비는 충주 엄정면 억정사지에 위치한다. 드론 촬용.
대지국사탑비는 충주 엄정면 억정사지에 위치한다. 드론 촬용.

그는 유교 지식인이었지만 불교를 멀리하지 않았다. 충주 엄정면 억정사지(비석2길 35-21)에 보물 대지국사(大智國師, ☞) 탑비가 존재한다. 박의중이 탑비의 문장을 지었다. 비문의 시작 부분에 '成均大司成臣朴宜中奉 敎撰'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성균대사성 신 박의중이 왕명을 받들어 짓다'라는 뜻이다. 박의은 특유의 간결하면서 힘있는 문체로 대지국사를 기렸다.

'국사는 의표가 괴위하고 기국이 넓고 깊었으며 성품은 총민하고 행동은 준엄하였으며 낯빛은 엄격하고 언어는 온화하였다. 입에는 좋고 나쁨이 없었으며 모습에는 기쁘고 성남이 없었다. 다른 사람의 지난 악행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비록 원수라 하더라고 회포에 남겨두지 않았으니 어떤 사람들은 이 때문에 훌륭하게 여겼다.'-<억정사지 대지국사탑비 내용 일부>

박의중은 특유의 문제롤 대지국사탑비 전문을 썼다. 보호각 안의 탑비 모습.

박의중은 조선이 들어서자 바다가 보이는 전북 김제 옥정마을로 낙향했다. 그가 왜 김제로 낙향했는지 문중도 답을 못하고 있으나, 그곳에 농장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낙향후 박의중은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할 때를 제외하고는 한양도성을 출입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 속에 "나는 고려의 신하이다"라는 다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한시에서 그런 느낌이 강하게 묻어난다.

'문닫고 용렬한 무리와 끝내 만나지 않지만, / 단지 푸른 산만 내 집에 들어오기를 허락하네./ 즐거우면 시를 읊고 나른하면 졸음을 즐기니 / 어떤 일도 다시는 내 마음속에 들어오지 않네.-<『정재일고』(☞) '척약재 김구용의 시에 차운함'>

'은둔하며 살아가는 맛을 아는 사람 드무니 / 낡은 울타리 둘러진 내 집을 홀로 좋아하네 / 아침에는 바다구름 보려고 일찍 창을 열며 / 밤이면 산달이 좋아 늦게야 주렴을 내리네. /…/

벼슬하느라 바빴던 몸 이미 병으로 늙었지만, / 태평시절 벼슬했지만 부끄럽게 이룬 공이 없네.'-<『정재일고』 '한가로이 살며 읊다'>

그는 김제에서 유유자적한 말년을 보내다 67세로 졸했다.

 

후손들 '문의박씨' 시조로 추앙하다

그의 후손들은 봉작호 '문의군'을 받은 것을 계기로 박의중을 '문의박씨' 시조로 추앙하고 있다. 우리고장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이 바로 문의박씨의 관향이다. 그의 후손들이 관향을 왜 문의 지역으로 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박의중은 첫번째 연안이씨와 사별하고 청주한씨를 두번째 부인으로 얻었다.

현재 문의 인근인 청주시 남일면 가산리에 청주한씨 시조인 한란(韓蘭)의 묘가 위치하고 있다. 이로 미뤄 박의중도 일정 기간 청주 문의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처가살이는 최소한 조선 전기까지 흠이 아닌 관습이었다.

기사 작성에 도움을 받기 위해 문의박씨 문중과 통화를 했다. 직손 박상재(77, 대구 거주) 씨는 "청주 중앙공원의 경관을 해치지 않는다면 공원 귀퉁이에 선생의 유적비를 하나 세웠으면 정말 좋겠다"고 말했다. 
 

☞지공거: 고려시대 시험 감독관을 말한다. 동지공서는 부감독관.

☞표문: 근대 이전 시기의 외교문서.

☞강동6주: 서희 장군이 거란과 담판해 회복한 압록강 하류의 6개 주.

☞대지국사: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충주 억정사 주지를 지냄

☞정재일고: 후손들이 1924년에 간행한 박의중의 시문집.

관련기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